25세 지하운동가의 참회(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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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저는 사회발전을 위해 보다 필요한 것은 좋은 머리보다 넓은 시야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현란한 관념과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화해와 협력분위기가 무르익던 남북관계를 후퇴시키는 반통일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여윈 몸매를 한 「남한노동당 중부지역당 간첩사건」의 황인욱피고인(25)이 자신의 간첩행위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쏟아놓은 2일 오전 10시30분 서울형사지법 중법정.
이번 사건으로 자신을 포함,어머니·형·형수 등 가족 4명이 모두 영어의 몸이된 황 피고인의 모두 진술은 우리나라 대학가에 가장 진보적 이념으로 둔갑돼 유행처럼 번져왔던 주체사상의 종말을 예고하는듯 했다.
6년전 5공화국 당시 떳떳하게 법정에 섰을 때와는 달리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속에 법정에 섰다는 황 피고인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무장한 안기부 수사관들 앞에서 아무런 정당성도 주장하지 못한채 사회상황의 변화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패배한 지하운동가」에 비유했다.
「죽어도 주체신념을 지킨다」던 맹세문과 당규약을 작성했던 황 피고인은 또한 『우리는 이제 다양한 삶의 가치를 인정하며 위장된 이데올로기의 남의 행복을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며 『나의 재판이 조국의 통일에 가로놓인 가시철망을 거둬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황 피고인은 북한 당국에도 『자주·민주·통일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지하당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지하공작은 불가능 하며 무익하다』며 『김일성이 수여한 조국통일상을 정식으로 반납하며 그 명부에서 나를 지워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농부 아버지·광부였던 형을 두었던 한 대학생이 주체사상이란 열병에 전염됐던 과정을 그린 투병기와도 같은 그의 진술은 마치 경직된 사고와 행동양식에 물든 이들을 향한 경고처럼,또 우리들을 향한 절규처럼 법정을 그득히 메웠다.<권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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