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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남대문로 희귀사진 첫 발굴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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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건축가 김종영 씨가 소장한 개화기 희귀사진을 처음 공개한다. 당시 사대문 안 최대 번화가였던 남대문로 일대를 담은 것이다. 필자는 길 양편의 가가(假家)에 주목했다. 오늘 그 일대는 어떤 모습일까?

(사진1) (‘THE QUEEN OF KOREA’, 1894. 11, Frank G. Carpenter)에 ‘서울의 중심 가로’라는 제목으로 실린 남대문로의 모습. 거리 좌우로 한옥 상가 앞쪽으로 초가로 조성된 가가(假家)가 늘어서 있어 상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2와 비교해 보는 느낌이 묘하다.

(사진2)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 된 대한민국의 금융ㆍ유통 중심지로 우뚝 선 남대문로의 오늘. 우리은행 옥상에서 찍었다. 경복궁 뒤 북악산과 북한산의 스카이라인을 비교해 보면 옛 사진은 좀 더 낮은 위치에서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구한말 서울의 최고 번화가였던 남대로문로 일대를 담은 가장 오래된 사진이 처음 발굴됐다.

18일 발매에 들어간 월간중앙 7월호는 건축가이면서 조선말 사진수집 전문가인 (주)혜원까치종합건축사사무소 김종영 소장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을 입수해 공개하면서 거의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을 동시에 게재 약 110년 간의 변화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보도했다.
김종영 소장이 가지고 있던 이 사진은 ‘조선의 왕비’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첩에 실린 것. 저자인 프랭크 카펜터(Frank G. Carpenter)는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을 붙이지 않은 채 비운의 왕비인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만 담았다.

이번 <월간중앙>이 공개한 남로문로 사진은 촬영 시기가 갑오개혁이 있었던 1894년 이전으로 올라가며, 훼손되기 전 남대문로 상황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는 게 김종영씨의 평가다.

지금까지 알려진 남대문로의 경우 종로와 가까운 광통교 주변과 남대문시장 앞쪽, 한국은행(화폐박물관) 주변 정도만 알려져 있는 데다 촬영 시기도 대부분 1920~30년대의 것이었다.

(사진3)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주변의 1930년 무렵. 당시로는 드문 항공사진이다. 일본의 식민통치 성과를 과시하던 상징적 공간인 삼각형의 ‘센긴마에(鮮銀前)광장’이 뚜렷이 보인다.

(사진4) 보신각 쪽에서 남산 쪽을 조망한 1905년 광교 주변.(, Carlo Rossetti, 1905) 사진 중앙에 광교가 보인다.

사진은 지금의 중앙우체국 위치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을 뒤로하고 백악(白岳)을 중심으로 자리한 경복궁이 광화문ㆍ근정전ㆍ경회루와 함께 왼쪽 상단에 선명하게 보이고, 비스듬하게 형성된 길은 오른쪽 상단에서 종로(鍾路)와 만나 더 이상 북쪽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 종로와 만나는 길이 종루(보신각)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남대문로다.

길의 좌우에는 한옥 상가가 형성돼 있고, 그 앞쪽에 초가로 조성된 가가(假家-헐고 옮기기 쉽게 임시로 지은 집)가 추가로 조성돼 있음을 볼 수 있다. 길에는 수많은 사람이 물건을 흥정하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흰 두루마기에 갓을 썼으며 간혹 검은 옷의 당시 군인과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5) 보신각 쪽에서 남산 쪽을 조망한 최근의 모습. 남산은 건물에 가려 아예 보이지 않는다. 중앙에 보이는 신한은행 건물 바로 앞에는 옛 교각을 그대로 사용해 복원한 광교가 청계천에 걸려 있다.

(사진6) 현재의 을지로 입구에서 광교 쪽을 조망한 경관. 그 풍을 알 수 없는 콜로니얼 양식의 건물군이 제법 고색창연하다. 도로 오른쪽의 붉은색 벽돌 건물이 눈에 익다.

(사진7) 사진6의 현재 모습. 뜻밖에 당시 건물 가운데 한 채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건축 당시부터 은행으로 쓰였고 지금도 여전히 은행건물로 쓰이는 광통관이다.

멀리 광통교 너머 종로와 만나는 부근에는 제법 큰 규모의 상가와 함께 2층 건물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근대 문화의 이입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는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을지로가 형성됐을 지점인 지금의 롯데백화점 부근에도 변형된 2층 한옥 건물이 보이는데 정확한 건물의 용도 등은 규명이 쉽지 않다.

조선시대 도성인 한양의 간선도로 체계는 궁성 앞의 남북 가로와 서대문과 동대문을 연결하는 동서 방향의 종로, 종루(鍾樓)와 남대문을 연결하는 남대문로가 있는데, 전자가 ‘주작대로’로 불리듯 기념적 상징 가로인 반면 후자는 일상생활의 중심 가로로서의 성격을 띤다.

전체적인 형태는 ‘정(丁)’자 형으로 간선도로가 서로 어긋나게 만나며, 직선이 아닌 구부러진 비정형의 유기성을 기본으로 한다. 종로와 남대문로의 곡선 노선은 서로 마주보면 음양 이치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회적 관념을 특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진8) 현재 롯데백화점 자리인 조선식산은행 본점 앞 풍경.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기존 농공은행을 흡수해 출발했는데, 1923년 기존 건물을 좌우로 증축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사진은 1923년 이후에 촬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9) 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1905년 무렵의 보신각 주변.(, Carlo Rossetti, 1905) 보신각 옆으로 전차가 지나가고, 그 옆 좌판을 벌여놓고 갓을 파는 장수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멎진 파라솔까지 만들어 놓았다. 댕기머리를 땋은 소년들이 좌판 주변에 늘어서서 무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정겹다.

(사진10) 사진9의 현재 모습. 왜소한 단층 종각 대신 비록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우람한 2층 누각이 서 있다. 종각에서 종로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으로 알려진 화신백화점 건물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초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조선 초 태종 13년(1413)에 완성된 시전 행랑은 종루에서 서북쪽으로 경복궁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창덕궁과 종묘 앞 누문, 남쪽은 숭례문 전후에 이르러 좌우 행랑 규모가 1,360간으로, 남대문로의 시전 행랑은 이때 선형 체계의 상업 가로로 계획됐다. 남대문로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금융ㆍ판매 중심의 상업 가로였고, 현대에는 판매ㆍ업무 중심의 상업 가로로서 그 성격을 유지 변천해오고 있다.

개화기를 전후한 조선 후기 도로정책은 ‘육전조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각별히 정한 기능은 임금의 거둥, 칙사의 행차, 인신(국장)과 관련된 사항으로 이러한 주요 행사를 치르는 것이 대로의 주된 기능이었다. 따라서 행사가 없을 때는 행랑 및 가가에서 이루어지는 상행위의 장이었다.

1882년 한성판윤이 된 박영효는 일본의 ‘치도규칙(治道規則)’에 따라 지저분한 도성 내 도로를 정비하고자 ‘치도약칙(治道略則)’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주로 인력거와 마력거 및 사람의 통행에 관한 사항이었는데, 이와 함께 가가에 관한 규제도 있었다. 볏짚을 이용한 가가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경우 쉽게 번질 우려가 있어 가가를 철거해 도로를 정비하고자 했다.

한성부윤 유정수 ‘가가금령(假家禁令)’ 발표

그러나 도로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과 함께 상가로서 가가가 일반 백성에게 매우 유용했기 때문에 백성의 반대로 박영효의 의지는 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한성판윤 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만약 박영효의 정책이 시행됐다면 카펜터의 사진에 나타난 가가의 생생한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895년 4월16일 한성부윤 유정수의 명으로 ‘가가금령(假家禁令)’이 발표된다. 즉, 도로를 침범해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일절 금하는 지시였다. 그 취지는 일차적으로 도로의 원래 폭을 회복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일본인의 남대문로 진출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중앙 7월호 참조)

김상진 월간중앙 기자,kine3@joongang.co.kr]
권태균 월간중간 사진팀장 (현재사진 촬영)

*** 옛 사진 제공/글 김종영

프로필= 1958년 출생. 단국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관아건축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 취득 후 박사과정을 마쳤다. 대한건축학회 정회원으로, 서울산업대ㆍ단국대ㆍ삼육대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주)혜원까치종합건축사사무소 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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