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거짓말 후보 안찍겠다”/청중들 자세가 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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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원 자제… 대부분 자발적 참여/후보들 발언내용 꼼꼼히 분석
유세장 청중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유세초반이어서 아직 열기가 달아오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바로는 향응이나 금품을 받거나 관권의 동원으로 유세장에 나오는 청중은 과거 선거때와 비교해 현저히 줄어든 것 같다. 청중의 규모는 작지만 자발적 청중의 비율은 현격히 높아졌다.
이 때문인지 청중들의 유세장에서의 태도·반응은 매우 차분하고 진지하다. 기선장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각 당 찬조연사들의 인신공격이나 후보들의 열변에도 청중들은 오히려 분석적 경향마저 보인다.
○…모당 후보의 21,23,24일 충북 충주,경기 이천·하남,충남 서산 유세의 경우 유세장 외곽에서 유세를 경청하고 있는 시민들은 거의 3명에 2명꼴로 아직 찍을 사람을 정하지 못했다고 밝혀 부동층이 두텁다는 인상을 주었다. 20∼30대가 대부분인 이들 부동층은 결심이 서지 않은데 대해 각당 공약의 유사성·정치불신 풍조 등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했다.
충주 유세에서 오태형씨(38·회사원)는 『후보들 공약이나 청사진이 너무 장미빛이고 엇비슷해 이것만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워 회사일을 제쳐놓고 유세장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막걸리나 같이 하자고 은근히 권하는 사람도 없고 술냄새를 풍기며 꼭 누구를 찍어야 한다고 귀찮게 달라붙는 사람도 없는걸 보니 많이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이천에서 주부 김숙자씨(30)는 『후보들의 우리 지역개발에 관한 약속을 듣고 나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김씨는 『우리는 누구보다도 이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곳에 관한 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그들의 사람됨됨이까지 파악할 수 있다』며 『조그마한 지역에 대해서도 믿음을 주지 못하는 후보에게 국가살림을 맡길 수는 없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직업을 밝히길 꺼려한 이경호씨(52)는 『이제까지 우리 정치는 너무 혼탁했다. 솔직히 그런 토양에서 자란 후보들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신인이랍시고 나온 사람도 과거 경력을 볼때 영 탐탐하지 않다』면서 『주권은 행사해야 할텐데 현재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차선책으로 국민을 얕잡아 보는 형태를 보이거나 다른 후보를 깎아내려 이를 꾀하는 사람은 우선 배제해가는 방법으로 후보를 고르겠다』고 했다.
○…하남 유세에서 조신행씨(36·국교교사)는 『지난 87년 13대 대선에 비해 선거풍토가 괄목할만큼 좋아졌다』며 『정치는 우리의 거의 모든 생활과 다양한 형태로 접하게 되므로 전혀 무관심할 수는 없고 차선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라고 유세장에 나온 이유를 밝혔다. 회사원 이광석씨(27)는 『안찍을 사람은 결정했으나 찍을 사람은 차근차근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태안에서 일부러 서산유세를 보러왔다는 김각곤씨(38)는 『주요 후보의 정치 또는 경제 업적은 잘 알려져 있으나 인품과 국가 경영능력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며 『유세든,TV토론이든 가능한 한 모든 판단자료를 모아 이것저것 따져본뒤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24일 제천 유세장에서 만난 또 다른 당의 청중들 반응 역시 비슷했다. 양창봉씨(47·상업·제천시 중앙로1가)는 『인물·정책·유세장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3당후보의 연설에 모두 참석했다』고 했다. 전재복씨(47·회사원)는 『인신공격 하는 후보에게는 절대 표를 안주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날 홍천유세장의 강경철씨(39)는 『경리만 남겨놓고 직원 4명과 함께 나왔다』며 『인물과 정책대안을 꼼꼼히 살펴보겠다』고 연설대를 주시했다.
○…부동층 중에는 드물기는 하지만 기권파와 무관심파도 있었다. 하남유세에서 최근 군복무를 마치고 내년에 대학 3학년에 복학할 예정이라고 밝힌 신현문씨(24)는 『마음에 드는 후보가 전혀 없으므로 기권할 생각이다. 유세장에 온 것은 선거에 대한 나름의 현실감각을 갖기 위해서다』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일용직 노동자라고만 밝힌 20대초반의 남자는 『누가 되더라도 우리같은 사람을 잘 보살필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 온 주목적은 연예인 공연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아예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했다.
참여파든,기권·무관심층이든 부동층의 말을 종합해볼때 후보들이 지지호소에 앞서 당장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것은 신뢰감인 것 같다. 과거처럼 「거짓말이 외삼촌보다 낫다」는 식으로 터무니 없이 말의 성찬만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부동층은 「잣(척) 눈도 모르고 조복을 마른다」던 지난달의 무정견·무소신의 떠돌이층은 더 이상 아니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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