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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정치야, 너 자꾸 역사 건드릴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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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에드가 볼프룸 지음, 이병련.김승렬 옮김

역사비평사, 284쪽, 1만3000원

어느 나라에나 잡티 하나 없는 영웅담만으로 이뤄진 역사란 있을 수 없다. 자랑스러운 과거가 있는가 하면 감추고 싶은 과거도 있는 법이다. 역사는 이를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부각시킬 것은 부각시키고, 추릴 것은 추려내는 게 역사 쓰기의 흔한 패턴이다. 이게 심하면 역사왜곡이 되고, 이를 둘러싼 갈등은 역사전쟁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래서 역사란 서술하는 게 아니라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나.

이 책은 역사를 보는 현실적 시각의 문제를 다룬다. 논조는 매우 비판적이다. 특히 역사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던 나치를 강력히 비판한다. 또 현대 민주사회에서도 역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집단이 도처에 있다며 경종을 울린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지은이의 개념 규정은 냉소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는 "역사학이란 진리 탐구와 계몽 이외에도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풀이한다. 이어 역사 해석을 둘러싼 갈등을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고도 규정한다.

왜 역사가 정치의 한 가운데 서게 됐을까. 지은이의 말을 빌자면 기억을 규정하는 힘을 가진 자, 즉 특정한 기억은 계속 상기하면서 그 외는 망각하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시대가 나아갈 바를 제시하면서 현실 인식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그 전형을 나치의 '역사정책'에서 찾는다. 나치는 집권을 위해 게르만 민족의 영광의 역사를 발굴하고, 이를 가공해 대중 선동에 활용했다. 나치에게 있어서 역사는 중요한 집권 도구였다. 책 제목처럼 독일사는 나치에게 고성능 무기가 됐던 셈이다.

지은이는 역사 바로 세우기도 정치적 의도에 영향받을 수 있다고 본다. "상대에게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고도의 역사정책적 전략일 수 있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은이는 구 서독의 역사 바로잡기가 100% 순수하지만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이스라엘에 대한 배상은 반대 여론이 많았는데도 열강의 눈치를 살핀 외교전략에 의해 결정됐다고 한다. 물론 패전 이후 독일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역사를 반성했다. 하지만 일부는 국가전략적 차원에서, 아니면 등 떠밀려 했다는 얘기다.

지은이는 마지막으로 2000년부터 독일 정치권에서 나온 민족기념비 건립 구상에 대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역사를 둘러싼 전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미래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과거 해석의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는 굴절의 역사를 경험한 한반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과거사를 규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과연 이런 정치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자문하게 한다.

지난 해 번역된 역사학자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세트로 읽으면 안목을 키울 수 있을 듯하다. 지은이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현대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일러스트레이션=차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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