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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학마다 외국어·컴퓨터 학습 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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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북경 서북쪽 중관촌 일대는 대학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명문으로 세계에 알려진 북경대학과 청화대학, 그리고 법정대·사범대·의과대·인민대·이공대·중앙민족학원·외국어학원 등 북경소재 50개 대학들 대부분이 이곳에 몰려있다.
어학연수 등으로 한국에서 온 유학생숫자도 이미 5백 명을 넘어섰다. 틈틈이 외국학생들도 눈에 띄는 이곳 중관촌은 특유의 활기가 넘친다.
그러나 밤이 되면 의외로 인적이 뜸하다. 몇 군데 이면도로에 색 전구로 장식한 바·레스토랑이 겨우 어둠을 씻어주고 있을 정도다.
땅콩안주·양주잔을 놓고 앉은「제3세계」출신의 흑인 대학생들에게 북경 여대생이 아르바이트로 술시중을 들고 있다. 수입은 시간당 1위안(한화 1백50원)꼴. 하루 6시간 정도 일 한다. 한달 2백위안(3만원)수입이 학생에겐 적지 않은 돈이긴 하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개방바람이 불면서 중국 대학사회에서 나타난 변화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소비문화·향락풍조의 등장이다.
『영화나 TV를 통해 외부세계를 접하면서 중국의 현실과 비교하게 된다. 누군들 좋은 생활을 선망하지 않겠는가. 삼한 대학생의 이유 있는 항변은 중국의 젊은 세대가 거쳐가야 할 불가피한 과정으로 자연스런 것이었다.

<고급의류 인기>
고급브랜드를 붙인 청바지·신발·티셔츠·점퍼 등이 인기를 끌면서 대학생들의 소비수준이 부모의 월급보다 높아지고 있다. 학생들끼리 월 2백∼3백 위안 규모로 서로 돈을 빌려주는「삼각채」풍속이 등장하고 있다.
간혹 서방의 록 그룹이 찾아오면 북경의 노동자 체육관은 수만 명의 젊은 청중이 모여들어 한장에 20∼30위안짜리 입장권이 1백 위안 이상으로 암표가 팔려나갈 만큼 열광적인 인기를 끈다.
부모를 외출시키고 남녀 대학생들이 집안에 모여 양과자·촛불 등을 마련해「서양식」분위기를 연출하는 파티. 그 동안 이름조차 생소하던 크리스마스가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점차 새로운 명절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의 젊은 세대 변모를 말해준다.
그러나 시간을 무한정한 자원인 것처럼 낭비하는 것이나 온갖 구실로 놀자판을 벌이는 것은 원래부터 있어온 대학생활의 속성이라고 한 대학생은 지적한다.
대학출신이 아니면 출세길이 없는 중국의 입시지옥은 자본주의 사회 뺨칠 정도. 그러나 일단 관문을 통과하면 대부분이 무위도식하는「무중력상태」에 빠진다.
국가로부터 숙식보장에서 졸업 후 취업까지 1백% 보장돼 있는데다 매월 57위안의 보조금까지 받는다.
「국가 돈으로 하는 국가를 위한 공부」이기 때문에 내자신의 것으로 절실하지 않으며 어차피 결과는 차부다(비슷비슷)인 것이다. 그러니 애써 공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모택동 만세, 공산당만세부터 배웠다. 그러나 이제 사회현실은 우리가 배웠던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개방·개혁의 충격 앞에 소비풍조에 휩쓸리는 한편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진로 등에 관한 모색이 제기되는 것은 물론이다.
『기숙사 안에서는 학생들끼리나 학생과 교수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자주 벌어진다. 그러나 공개된 장소에서 정치적 주제를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대학사회는 개방·개혁의 주역으로 역할하기 보다 감시와 통제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다.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대학사회에서 정치적 이슈가 표면에서는 자취를 감춰버리고 개인위주의 취업이나 출국을 위한 외국어·컴퓨터 붐, 그리고 소비문화가 범람하는 현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86년에 3∼4위안하던 책값이 이제 20위안으로 5배나 올랐다. 그러나 대학의 도서 구입비는 제자리걸음이다. 30여년 경력의 한 대학교수의 월급은 2백50위안, 신간서 1권에 수백 명이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여건에서 정상적인 교수나 연구란 기대하기 어렵다고 실토한다.
『지식과 지식인을 경시해온, 사회주의 정책아래 책을 사보는 사람이 없다. 더구나 학술서적이라면 아예 출판조차 불가능한 실정이다.』
난관을 무릅쓰고 출판을 해도 2, 3년이 족히 소요되어 책이 나올 때는 거의 무용지물이기 일쑤. 중국 최대 출판기관 신화서점 서가가「빈혈증」에 빠져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책 거의 안 사봐>
이 같은 대학교육의 현실 위에 신화통신이 최근 『개혁이 중국 지식 분자(지식인)들에게 더 많은 치부의 기회를 주었다』고 소개한 남경대의 사례는 경제발전과 대학의 관계를「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남경대 상과대학장이 2개의주식회사 사장을 겸임해 큰돈을 벌고 있다고 소개한 이 통신은 이밖에도 수백 곳의 대학과 연구기관의 지식분자들이「정부의 권장」아래 과학기술 및 비즈니스 분야에 투신하고 있다고 전했다.
각 지방에서는 과학기술분야인력에 승용차·아파트 이외에 수십만 위안의 보너스까지 제공하면서 유치 경쟁을 벌여 지식분자의「몸값」이 계속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
복건자의 경우 경제발전에 따라 소요되는 전문인력 확보를 위해 고등교육기관 인력 가운데 20%는 산업일선에 투입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남경대 등 일부대학은 아예 대학 담장을 2백여m씩 허물어내고 있다. 회사와 사무실을 차려 교수들이 생산한 과학기술제품들을 직접 경영·판매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선 경제건설 후 대학발전인 셈이다. 그 동안 대학사회 자체가 교수·학생을 막론하고「철밥 그릇」길들여져 왔으며, 이의 해결은 자체적으로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가 깔려있기도 하다.
국가에서 더 이상 계획경제의 틀을 고수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학이「목마른 자가 샘 판다」는 식으로 스스로 해결을 모색해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대학·국가 어느 일방의 주도에서라기보다 지금까지 입학·교습·취업에 이르기까지 관철됐던 사회주의원칙들이 하나씩 매듭이 풀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북경지역에 자비 진학생을 입학정원의 20%범위 안에서 별도로 선발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교육제도의 자본주의화」로 주목을 끈다.
이번 가을 신학기의 북경지역 대학 지망생은 3만9천9백여 명. 이 가운데 1만6천2백여 명이 자비 진학생으로 시험에 응했다.
결과는 신입생 1만7천5백여 명 가운데 10%가 조금 넘는 1천8백35명이 자비생. 자신의 학비로 자신의 공부를 하는. 사회주의 중국 건국이래 공전의 일」(신화통신)에 해당된다.
『북경대라고 하여 수재만 모이는게 아니다.』
한 대학생은 사회주의 제도아래 지방과 소수민족 출신이 중앙정부의 점수 조정으로 일정 비율의 입학배정을 받아왔다고 설명한다. 학생에 따라 전국 공동으로 출제되는 시험성적이 6백40점 만점(이공계는 6백90점)에 2백∼3백점 차이가 난다.
옥과 석이 한자리에 앉아 교수는 강의수준을 중간에 맞춘다. 낡은 강의내용에 맥빠진 분위기, 여기에 자비 진학생의 출현은 신선한 자극이 되고있다는 것이 당국의 평가다.
성적이 결코 공비 진학생에 뒤지지 않으면서 졸업 후 국가배정 취업대상도 아니므로 악착같이 공부하려는 기질에다 학비조달 부업을 가지기도 해 취업에서 오히려 외국기업체의 환영을 받는다는 것이다.

<학비 6천 위안>
자비 진학생의 학기당 학비는7백∼8백 위안 수준. 4년간 학비도 최소한 6천 위안의 거금이 든다. 자비부담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교육실비의 50%에만 해당된다 그러니 거꾸로 그 동안 국가의 교육비 부담규모와 비효율에 의한 낭비가 얼마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공비로 졸업한 학생은 국가배정에 따라 5년간 국가에 봉사할 의무를 진다. 도중에 외국투자기업에 옮기면 월급의 70%가 일률적으로 국고에 귀속되는 외에 학자금 보상으로 1년에 1천2백 위안씩을 국가에 환불해야 한다.
『중국 대학교육은 점차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있는 집 아니면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기 어려운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 학부모는 우려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현실적으로 대학사회가 재편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미 바뀔 수 없는 대세가 되고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직 중국에서 대학사회의 건전한 성장은 아득해 보인다. 모든 사람에게 의식주와 교육을 보장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이미 개인의 경쟁원리에 발전과 해결의 책임을 넘기고 있다.
대학사회가 이를 통해 새로운 발전동력을 얻게될 가능성은 상당치 큰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대학사회의 변모와 발전이 중국 사회주의체제의 개방·개혁작업을 지원하는 인재의 산실이 될지, 아니면 체제자체를 해체하면서 새로운 이념과 질서를 창조할 주역이 될지 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글=전택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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