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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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금융 감독 당국이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수수료를 낮추자니 시장원리에 안 맞고 그냥 두자니 영세 가맹점과 정치권의 압력이 갈수록 거세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본래 지난달 말께 '카드수수료 원가 산정 표준안'을 마련, 이르면 이달부터 각 카드사의 가맹점 수수료 산정에 반영하려고 했다. 수수료를 둘러싼 영세 가맹점과 카드사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격해지자 직접 교통정리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수수료 산정은커녕 이해 당사자 간 토론회 일정조차 잡지 못해 표준안 마련이 표류 중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11일 "수수료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차가 너무 큰 데다 정치권이 잇따라 수수료 인하 관련 입법을 하는 등 사회적 압력이 높아 쉽게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표류하는 표준안=표준안 마련 작업은 금감원의 의뢰를 받아 금융연구원이 진행 중이다. 금융연구원은 애초 5월로 예정했던 연구 결과 제출 시기를 이달 말로 미룬 상태다. 특별한 이유없이 금융연구원의 연구 결과 제출이 미뤄지면서 해석도 분분하다. 연구 결과가 당국의 예상과 다르자 감독 당국이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금감원은 2월 금융연구원에 연구를 의뢰할 당시만 해도 연구 결과에 따라 적정 수수료 범위를 제시할 방침이었다. 업계에서는 연구 결과가 수수료 인하 압력으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막상 분석을 해보니 카드 수수료는 규모의 경제에 영향을 받는다"며 "영세 가맹점의 수수료 인하 요구는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난감한 측면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전방위 공세 나선 정치권=국회에는 현재 카드사의 가맹점 수수료 관련 입법안이 4개 올라와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영세 가맹점 수수료를 낮춰야 한다는 데는 일치한다. 자칫 잘못하면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논리에 따라 시장원리에 어긋난 법안이 만들어질 수 있다.

여기에 최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한술 더 떠 2차 수수료 공세에 나섰다. 지난달 말 노 의원은 7개 은행계 신용카드 회사가 지난해 체크카드로만 1890억원의 부당 이익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신용카드사들의 수익 중 가맹점 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46%에 달한다며 공세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여신금융협회는 "지난해 카드사들이 흑자를 낸 것은 가맹점 수수료 때문이 아니라 대손상각비가 줄었기 때문"이라며 반박했다.

◆고민 깊어지는 금감원=정치권을 비롯해 수수료 인하 압박은 심해지는데 정작 수수료를 낮출 만 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 보니 금감원의 고민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경제논리로 따져 보면 영세 가맹점이 수수료를 더 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다만 업종별 차이를 어느 정도 두는 게 맞는지 용역 결과가 나오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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