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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39. 박두병 두산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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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7년 제10회 한국오픈에서 우승해 대회 3연패를 달성한 필자가 박두병(右) 대한골프협회장으로부터 우승트로피를 받고 있다. [중앙포토]

두산그룹(옛 OB) 창업주인 고 박두병 회장의 '골프 사랑'은 남달랐다. 박 회장은 1965년 출범한 대한골프협회의 초대 회장과 서울컨트리클럽 제7대 이사장을 지냈다.

나는 그분을 통해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얻었다. 바로 골프 매너다.

서울컨트리클럽 5번 홀은 파5 롱홀이었다.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진 도그레그홀이어서 티샷을 페어웨이 왼쪽으로 보내면 그린이 보였다. 오른쪽에서는 그린이 잘 보이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어느 날 라운드에 나섰다. 그런데 바로 앞 조가 박두병 이사장 팀이었다.

내 티샷은 페어웨이 약간 오른쪽에 떨어졌다. 그린이 보이지 않았지만 세컨드샷을 날린 동반자들이 순서를 기다리던 내게 "쳐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린 근처에 보내자'는 생각으로 샷을 날렸다.

어라,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 공이 페워웨이에서 크게 튕기더니 그린으로 굴러 올라가 퍼팅을 하고 있던 박 이사장의 다리에 맞고 멈춘 것이다. 큰일났다 싶어 나는 죽어라 뛰어가 사과했다.

"이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보이지 않아 무심결에 공을 치고 말았습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용서를 빌었다.

6번 홀 앞 그늘집에 있던 박 이사장은 "잘 보고 쳐야지 골프를 그렇게 해서야 되겠나. 그래서 무슨 선수가 되겠어"라고 꾸짖었다. 화가 덜 풀린 듯했다. 라운드를 마치고 나서 다시 박 이사장을 찾아가 거듭 사과를 드렸다.

"자네, 연덕춘 프로한테 이야기해 놨으니 앞으로 정신 차려서 잘 배워"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건이 그대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 뒤 연 선생이 날 불렀다.

"너 당분간 골프를 못하게 하라고 하신다"고 말했다. 골퍼한테 라운드를 하지 말라니. 다른 골프장이 없던 그 시절 그 말은 내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며칠을 기다렸다가 연 선생에게 "제가 가서 다시 용서를 빌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서울 종로5가 근처 박 이사장 댁으로 찾아갔다. 나는 두 번의 속죄 방문 끝에 "다시는 그러지 마라"는 말씀과 함께 사면령을 받았다.

당시에는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부터 라운드를 할 때 앞 팀을 배려한다. 정말 좋은 습관을 익힌 것이다.

박 이사장은 원칙을 강조했고 아주 깐깐했다. 특히 말수가 적었다. 50년대 후반부터 서울컨트리클럽 부이사장을 지내 나는 골프 입문 이후 군자리에서 자주 뵐 수 있었다. 박 이사장은 주로 가족과의 라운드를 즐겼다. 아들.딸.사위.며느리 등이 동반자였던 골프를 즐길 줄 아는 신사였다.

골프는 에티켓의 스포츠다. 골프 규칙서 맨 앞에 나오는 것이 에티켓이다. 에티켓과 규칙을 잘 알고 잘 지키는 골퍼가 공을 잘 친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아는가.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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