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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원류를 찾아서<4> 시베리아 3대강 유역 고고학 기행 최몽룡<서울대교수>|유라시아문화의 거울 미누신스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시베리아 남부 사얀산지에서 나와 시베리아 중앙부를 세로로 관통해 흐르는 강이 예니세이강으로 전장 4천1백30㎞며 그 유역면적은 2백59만2천평방㎞에 달한다. 이 강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는 동서로 나누어진다. 이 강은 사얀산지의 동부 작은 호에서 발원하는 대 예니세이, 탄느오라 산지에서 시작하는 소 예니세이강이 고원성 초원지대인 투빈소크분지(표고5백50∼7백m)에서 합류해 예니세이강이 되어 하류인 북극해 남부인 카라해로 흘러들어 간다.
우리는 구르탁 발굴캠프로부터 동남쪽 약 2백㎞떨어진 미누신스크안에 있는 말라야시야와 손두기 발굴 캠프를 찾았다.
예니세이강의 상류에는 미누신스크 분지가 있다. 이곳은 초원·초원과 침엽수림·침엽수림지대의 세 식물 군으로 나누어진다. 서쪽의 오브강과 예니세이강 상류의 한 지점은 겨우 5㎞ 떨어져 있다.

<터키계 하카시안인 거주>
서기 1000년께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키르기스인들은 이곳에 자신의 국가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은 키르기스가 조상인 터키계의 하카시인들이 대부분 살고 있다. 이곳은 13세기 칭기즈칸, 17세기 제정 러시아의 피터대제에 의해 점령당했다. 집도 몽고와 같은 파오형이나 아래가 6각이고 위에는 원추형의 지붕을 가진 것이 다르다. 이는 하카시인이 알타이·투바·타타르·쇼르 추림·토파와 야쿠트인들과 같이 몽고계가 아니라 터키계통이기 때문이다.
튀르크인들은 고·신의 둘로 나누어지는데 전자에 하카시인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모든 인종이 포함된다. 타슈겐트인들도 이에 속한다.
그리고 후자에는 서쪽으로 이주해 나간 오스만터키인들이 속한다. 이곳 노보시로보시 마을 근처의 국도는 1900년 레닌이 시베리아 유배를 마치고 지나간 곳으로 유명하며 그곳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세워져 있다.
미누신스크분지내 시야강과 벨리유스강이 합치는 말라야시야에 발굴캠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를 전공하는 유리 콜시킨, 구석기시대를 전공하는 유리 벨로코빌스키 두 사람이 공동으로 발굴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 밑에 30여명의 연구원이 발굴에 종사하고있다. 이곳에는 3만4천년전의 중기구석기 유적인 말라야시야가 대표적이다. 이 유적은 1975년 이후 발굴이 계속돼 오고 있다. 러시아의 고고학은 구석기시대가 주다. 신석기시대와 그다음의 청동기·철기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는 드물다.
미누신스크를 중심으로 하는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 문화의 동질성이 나타나는 것은 타가르시기다. 또 알타이지역에서도 이 시기에 러시아 남쪽의 스키타이문화와도 공통점을 보인다. 아마도 이는 초원을 배경으로 하는 문화의 이동이나 인종의 혼혈 때문으로 여져진다.
인도-유럽어족의 동쪽 경계가 예니세이강의 상류인 미누신스크지역이 되며 이들이 동쪽의 터키·몽고계와의 혼혈을 이루게 되는 것은 기원전 5∼3세기 사라가쉬기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서력기원 전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 주민들은 거의 황인종의 터키·몽고인들로 대체된 모양이다. 지금도 터키계의 순수한 하카시인보다 백인종과의 혼혈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석기 이후 중요한 성소>
특히 노보시비리스크 고고학·민족학연구소의 비탈리 라리체프박사가 발굴하고 있는 「보물로 가득찬 나무상자」란 의미의 손두기라는 유적에서 타가르시대의 암각화·무덤·해시계등이 발견돼 이곳이 기원전 3000년 신석기시대 이후 중요한 성소로 알려지고 있다. 암각화의 내용은 달·해·사슴·무당등으로 이것을 통해 당시의 종교와 천체관까지도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10여년전부터 유럽의 고고학계에서는 천체고고학이란 단어를 심심치않게 사용해 오고 있다. 데니스, 마샥등이 그들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영국의 거석문화 상징인 스톤헨지를 하지와 같은 천체의 움직임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원형으로 돌려진 거석, 천체의 움직임, 뼛조각위에 새져진 선·부호등을 1년의 하루 하루를 기록하는 달력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불가사의한 유적·유물들을 외계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곳 발굴책임자인 비탈리라리체프박사도 이와 같이 발굴하고 있는 유적·암각화를 전체의 움직임과 관련시켜 해석하고 있다. 주위의 다른 고고학자들은 그가 환상에 빠져있다고 비아냥하나 본인은 그 설을 고집하고 있다. 아무튼 이 유적은 타가르시대의 연구에 매우 중요하며 암각화는 그 자체로도 우리의 암각화와 비교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또 이웃하는 사라가쉬. 쉬라라는 곳에는 방형의 타가르 무덤 수십기가 산재해있다.
그러나 타가르시대에 속하는 청동거울·검등을 보니 거울의 배면에는 꼭지가 둘(다뉴)이 아닌 하나(단뉴)며 칼은 곡검(비파형)이 아닌 날의 가운데가 휘어진(만입)것이다. 다시 말해 타가르문화의 청동검·거울은 실제 만주지방에서 보이는 요령식(고조선식 또는 비파형)동검이나 거친 무늬거울과 다르다. 따라서 이 문화나 그에 앞서는 카라수크문화를 우리가 종래 생각해오던 우리 청동기문화의 기원에 직접 관련시키기에는 좀더 고려의 여지를 두어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이 지역에서 나오는 묘제·유물을 우리 것과 꼼꼼히 비교해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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