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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공유하는 시대, 상상해 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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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민음사가 주최하는 '오늘의 작가상'은 등단 10년차 이하의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장편소설 문학상이다. 이문열.박영한.한수산씨가 이 상을 받았다. '걸프렌즈'로 올해 제31회 '오늘의 작가상'을 거머쥔 인물은 신예 작가 이홍(28.본명 박희선.사진)씨. 생전 처음 소설을 끝까지 써봤다는 신인이다. '오늘의 작가상'으로 문단에 첫 발을 디뎠다는 건, 현행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화려하게 등단 절차를 밟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화젯거리는 또 있다. 이홍씨는 이른바 '한국일보 일가'의 사람이다. 일간스포츠 장재근(53) 전 회장이 이씨의 시아버지다. 그러니까 장재구(59) 한국일보 회장은 이씨의 시백부(媤伯父)가 된다.

"수상 소식을 듣고서야 가족에게 털어놨어요. 그 전엔 시댁.친정은 물론 신랑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처음엔 다들 놀라더라고요. 지금은 아니에요. 친정 어머니는 보약까지 해주셨어요."

이씨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작가를 꿈꾸며 살았다. 그러나 결혼(2002년)을 하고 곧바로 아기를 낳으면서 꿈은 계속 미뤄져야 했다. 그는 "상을 기대하고 응모한 건 아니었다"라며 "저는 단지 제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수상작 '걸프렌즈'는 한국소설이 숱하게 묘사했던 연애의 공식을 통렬히 깨뜨린다. 소설은 '유진호'라는 평범한 회사원을 둘러싼 세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 입장에서 보면 양다리가 아니라 세 다리를 걸치는 것이고, 여자 입장에선 한 남자를 놓고 세 여자가 각축을 벌이는 꼴이다.

그러나 작가는, 얽히고 설킨 이 치정의 구도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 세 여자가 한 남자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소설은, 생판 다른 연애 공식을 설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적 아젠더를 던지고 있다.

"오늘의 도시 문화는 많은 것을 공유해야 하는 문화잖아요. 어떻게 보면, 아파트는 사는 곳을, 기성복은 입는 것을 공유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만큼은 독점하려고 드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랑에 대한 독점이 깨지는 상황을 제 나름대로 상상해본 것이죠."

소설은 발랄하고 유쾌하다. 시종 통통 튀어 다닌다. 휴대전화.커피 전문점.명품 등 요즘의 문화 코드도 제법 잘 버무려져 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유진호가 나 '한송이'에게 기습 키스를 해온 멋쩍은 상황. 나는 괜히 휴대폰을 들고 액정을 들여다본다. 요즘 젊은이들이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여는 모습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소설은 제법 되바라지기까지 하다. '가을은 카 섹스의 계절이다'고 당당히 밝힐 땐 읽는 쪽이 되레 머쓱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즘의 연애는 하나의 취향 아닐까요? 운명 따지고 하는 건 너무 구식이잖아요. 맥도널드, 스타벅스, 커피 빈을 취향에 따라 고르는 것처럼 사랑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요?"

신예 작가는 활달했다. 하이틴 로맨스 따위의 대중소설이란 혹평이 나올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그는 "저로서는 어쩔 수 없죠"라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차기작을 물었더니 "재벌가 2세 청소년들의 삶을 써보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그들의 삶을 제가 조금은 알거든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여하튼 올해 '오늘의 작가상'은 여러모로 화제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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