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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흔한 소재지만 흔하지 않은 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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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간의 부드러운 손

김광규 지음

문학과지성사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로 비유했던 이가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였던가요? 초기 잠수함은 토끼를 싣고 다녔답니다. 물밑 항해 중 선실의 공기 부족을 빨리 감지하기 위해서였죠. 토끼를 보고 언제 물 위로 떠올라 공기를 채울지 결정했다니 토끼는 잠수함 선원들의 '생명줄'이었던 셈입니다.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로 보았습니다. 예민하게 깨어 있으면서 사회의 이상을 감지하고, 경고하는 것이 시인의 사회적 구실이라 보았던 모양입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바뀝니다. 시인 노릇도, 시에 거는 기대도 당연히 달라졌습니다. 구호나 격문 같은 시를 쓰다가 아예 '정치'를 하기도 하고, 싸구려 감상주의에 젖은 줄글을 모은 것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 즐기는 '암호'의 문학성을 찧고 까불기도 합니다. 모름지기 시인은 어떠해야 하며, 시는 어떤 글인지 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여기 한 권의 시집을 소개합니다. 목소리는 낮아도 읽는 이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빚어온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입니다.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일상시' '사회시', 또는'산문시'라고 평합니다. 흔히 보는 소재를 누구나 알 수 있게 노래합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 가볍지 않습니다.

가을비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진 후박나무 잎에 고인 빗물 한 방울에서 세상 이치를 봅니다('가을 거울'). 경이롭습니다. 대나무로 만든 효자손을 보고는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 보이지 않는 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떠올립니다('효자손'). 짠하죠. 신촌 로터리 혼잡한 오거리에서 휴대전화하느라 바쁜 청소년들 틈에서 우체통을 찾아 헤매는 노인의 모습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어냅니다('우체통').

어떤 장문(長文)의 고발 기사, 특집 방송보다 가슴을 치는 작품도 있습니다.

"십장생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들은/아내를 구타 치사한 남편/정부와 짜고 남편을 독살한 아내/양녀를 상습 성폭행한 의붓아비/전실 자식을 학대하다가 굶겨 죽인 새엄마/멀리서 찾아온 친모를 대문 앞에서 쫓아 보낸 아들/상속이 끝날 때까지만 부모에게 효성스런 딸/밥값을 못 벌어온다고 시아버지를 집에서 몰아낸 며느리/외손주 보러 온 장모를 집 밖으로 끌어낸 사위/아기를 뺏고 생모를 죽인 심부름센터 직원/훈련병에게 인분을 먹인 중대장/뿐이 아니다"('십장생보다 오래' 전문)

화려하거나 멋진 표현은 없습니다. 대신 뜻이 깊어 한 번 곱씹어 볼 메시지가 담긴, 그런 글입니다. 시인에게 거는 우리의 오랜 기대에 걸맞은 작품은 이런 것 아닐까요? 남다른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싶은 이들, 또는 늘 깨어있고 싶은 이들에게 권합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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