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이 탈당이후 해야 할 일/손학규(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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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선언보다 실천이 문제다/약속이행 역사평가 기준될 것
『나쁜 동기가 결과적으로 좋은 법을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노태우대통령의 탈당선언에 대해 우리 대학의 교수휴게실에서 나눈 토론의 잠정적 결론이었다.
나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생기면 곧잘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약식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이번 「탈당」건에 대해서도 대학원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학생들은 9·18선언이 김영삼총재와의 담합·밀약에 의해 정국 주도권을 회복해보려는 「깜짝쇼」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23일자 중앙일보 여론조사 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여기서는 탈당 동기를 60.7%가 개인적·계파적·당적 차원에서 찾고 있으며 20.5%만이 국가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민자당과의 관계도 67.4%가 공식·비공식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고 오직 8.9%만이 관계단절을 예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식·비공식의 여론조사 결과는 한마디로 노 대통령의 정치적 언행에 대한 국민들의 뿌리깊은 불신을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처세가 그만큼 외형적으로 표방한 명분과 그 실제적 의도 또는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어왔다는 의구심의 표현인 것이다.
나는 노 대통령에 대한 이러한 불신이 근본적으로 3당통합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중간평가 공약을 취소함으로써 지도자로서의 신망을 잃었고,「구국의 결단」이기보다는 권력 유지·획득을 위한 밀실야합으로 비춰진 3당통합때부터 YS에 대한 대권 줄다리기게임에 의해 「레임덕」현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노 대통령의 9·18선언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동기와 전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사결과에서 일견 모순되게 나타난 선언 그 자체에 대한 긍정적 평가(잘한 결정이라는 의견 63.7%,잘못된 결정이라는 의견 12.9%)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많은 학자·언론인들이 노 대통령의 선언을 정당정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 있지만 나는 이 선언은 권위주의사회에서 민주사회로 이행하는,특히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미시적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릇 역사에서 어떠한 지배세력이나 집권자도 애초부터 힘의 동기에서 자발적으로 피지배 세력에 권력을 내준 일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9·18선언과 같은 정치적 행위가 개인적 또는 당파적 동기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의 커다란 흐름에 부응한 국민적 도전에 집권자가 적절히 대응하는 것인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한가지 움직일 수 없는 조건이 따른다. 이 선언에 나타난 명분을 실천할 의지가 가시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고,또 그대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가지 당장 실천가능한 방안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중립내각의 구성을 위한 제정당 및 민간단체의 협의기구 구성,장·차관뿐 아니라 일체 별정직 공무원의 당적 이탈 등은 우선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제도적 차원의 조치일 것이다. 또 연기군 관권선거 및 안기부 흑색선전사건의 재수사는 노 대통령의 중립의지를 천명하는 정치적 조처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 조치에 선행해야 할 것은 대통령 자신이 선언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대통령 자신의 권위주의적 사고의 청산이다. 대통령의 말은 그것이 선언의 형태를 띠었든 지시의 형태를 띠었든 실로 법률적인 효력을 갖는다. 따라서 대통령은 자기의 약속은 법을 지키듯 지켜야 한다. 글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
이제는 「민자당 탈당」과 「선거관리 위한 중립내각 구성」이라고 하는 좋은 법이 만들어졌으니 이를 글자 그대로 지켜야 할 문제만 남은 것이다. 자기가 제정한 법에 스스로에게 예외를 인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사고다.
「집권당 초유의 자유경선」이란 미사여구아래 위장되었던 「외압」이 다시 나타나서는 안될 것이다. 이 「법」의 진실된 실천여부가 9·18선언의 배경이나 동기에 관계없이 노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최종 기준이 될 것이며,또한 정치적 행위의 평가기준에서 결과가 동기에 앞선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좋은 역사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서강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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