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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창간27주년 특집|「신세계」를 읽는다|세계석학들에게 들어본 그 앞날<1>|″동구경제개혁 한국이 모범답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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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오늘날의 세계는 냉전종식 후 터져 나온 지역·민족분쟁과 날로 강화되는 경제블록화현상, 위협적인 환경문제등으로 새로운 긴장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 또한 한국의 대 러시아·중국수교를 전후하여 미·일의 대북한관계 개선 움직임, 중국과 일본의 위상변화등 예측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고있다 본지는 창간 27주년을 맞아 우리의 앞날과 세계사의 흐름을 진단하는 국내외 석학들의 기고를 연재한다 여기에는 유럽부흥 개발은행(EBRD)총재 자크 아탈리박사(프랑스), 일본의 가미야 후지(신곡불이) 경응대명예교수, 예일대 폴 케네디교수, RAND연구소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상담역 (이상 미국) 유리 아파나셰프 러시아 인문대학장, 중국 북경대 지층웨이(계숭위)교수와 한국의 민두기교수(서울대 중국사) 등이 참여해 그네기의 세계와 한반도 주변 변화등에 관해 예리한 분석과 전망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주>
오늘의 세계는 격변하고 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독일이 통일됐고 러시아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나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인들은 장래문제를 (대결이 아닌) 협상하기로 합의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협상테이블에 자리를 같이하기로 했다. 이같은 대 변화들을, 또 그밖의 헤아릴 수 없는 변화들을 불과 5년전만 하더라도 감히 상상조차 했는가. 이처럼 변하무쌍한 세상에 뭔가를 자신있게 예측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확실한 것은 공포와 불신으로 점철된 냉전의 구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역사적 전환점에 서있다. 우리는 세계가 적대감과 절망감에 바탕 지정학적 질서로 뒷걸음질치도 수수방관해서도, 허용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문제들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이 기회를 이용, 그 문제들에 손대야 한다. 이는 시대적 소명이다.

<대안 찾는 일 없게끔>
20세기말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주의, 즉 파시즘 또는 보 다 끈질긴 위협이었던 공산주의의 도전은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권위에 대한 냉소주의를 남겼다. 전체주의 정권하에서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포기하도록 길들여졌다. 국가는 시민들을 실망시켰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정신적·육체적 수탈을 견디도록 강요했으며 약속된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지도 못했다. 이제 그 정권들은 대부분 소멸됐다. 오랜 고통끝에 미몽에서 깨어난 그 시민들은 그토록 자신들을 외면해온 성공을 불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민주정부를 신뢰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동유럽과 중유럽이 특히 그렇다. 지난 89넌 열광의 도가니속에 이 지역의 정치체제가 뒤바뀌고 공산주의에 조종이 울렸다. 그러나 새로 생긴 민주정부들은40년 동안의 침체와 불황을 딛고 나라를 정상궤도에 올려 놓을수 있는 정치·경제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시급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섣불리 볼 수 없는 엄청난 과제다. 이 신생민주국가들은 서유럽에서 수세대에 걸쳐 이뤄진 경제·정치·사회적 구조를 단기간에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나라들이 초기개혁실패로 파생된 문제들에 휩싸여 있다 . 서방 경제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작성된 폴란드의「발세로비츠 계획」은 폴란드인 들에게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번영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 나아가 이 계획은 많은 폴란드인 들에게 어떠한 경제개혁에든 저어하게 만들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도 경제개혁을 밀어붙였지만 불만 그룹들로부터 제거위협에 직면했을 뿐이다. 보수파에 의한 쿠데타가 실패한지 불과 1년밖에 안됐는데 말이다. 동유럽과 중유럽 사람들이 공산체제의 미몽에서 깨어났듯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도 내던지고 이도저도 아닌 대안을 찾아
나서게 될지 모른다 . 불과 3년전 공산주의장벽을 무너뜨릴 당시 대단한 열정을 과시 했던 이 기역은 이도 저도 아닌 대안을 찾아나서는 일이 없도록 해야함. 도덕적 의무가 있다 ,또 거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공산주의와의 결별로 이 지역에는 상당수 서방 경제전문가들로부터 「충격요법」을 도입하라는 많은 조언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제도마련이 급선무>
가격자유화, 정부보조금중단, 국유재산사유화, 국제시장에의 경제적 개방, 비효율적 기업의 폐쇄, 시장경쟁이라는 냉엄한 현실에의 노출 등등. 충격요법은 즉각 실업·예산적자·인플레를 수반한다. 따라서 충격요법은 주로 그 같은 고초를 격지 않아도 될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제하에서 보다 훨씬 열악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일반시민들 에게 어떻게 자유시장의 장점을 확신시킨단 말인가.
해답은 각 나라의 문제점을 면밀히 검토하고 나름의 특수한 처지를 평가해 그 나라 실정에 맞는 전략을 수립하는데 있다. 서방은 적극적으로 개혁을 북돋워줘야 한다 , 또 이 지역 신생민주국가들이 앞으로 몇년동안 부닥치게 될 문제들에 대해 구두단 이상의 것을 해줄 태세가 돼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이 나라들이 당면한 주요 문제는 개혁과정을 뒷받침할 제도의 구비다. 예컨대 상업은행의 신설이나 사업을 위한 법적 장치 마련등이 그것이다. 가격자유화는 과잉통화와 재화·용역에 대한 초과수요를 제거하는데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이는 화폐와 예산이 모두 안정되지 않고서는 이렇다할 효과를 볼 수 없다.
이 같은 제도상의 결점을 성공적으로 바로잡으려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정부만이 그 나라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40년 동안 정부개입 때문에 경제가 엉망진창이 됐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국민들이 이제 와서 정부를 신뢰해 줄 수 있을까. 그러나 국민의 지원은 필수적이다. 정부도 정책에 대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부는 갓 생겨나기 시작한 민간경제분야가 살아남아 궁극적으로 번영하게 되는 안정된 시장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정부역할은 자본주의에서 말하는「보이지 않는 손」에 해당된다. 이것만이 구 공산권에 시장경제를 성공리에 정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를 푸아시아의 호랑이들」의 최근 경험과 대비시켜 보면 어느 정도 적절할 것 같다. 아시아의 호강이들은 모두 급속하고 인상적인 발전을 이룬 나라들이다. 이들의 발전은 탈 공산국가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노선을 따라 이뤄졌다. 그중 한국은 비교적 단기간의 성과를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다. 한국은 지난 50년대 중방 미군장성들이 흔히 말했던 대로「소달구지경제」 에 머물러 있지 않고 두드러진 「자본주의 석세스스토리」를 이뤄냈다. 60년대 후반부터의 제 도확립과 교육투자에 대한 정부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이 최근 누려온 수출주도형 성장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동유럽과 중유럽의 정부들도 이와 비슷한 노선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이들 국가들이 강력한 수출산업을 육성함에 있어 한국에 견줄만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여타 신흥공업국군(NICS)은 세계각국의 경제적 경쟁이 지금보다는 덜한 상황에서, 게다가 브레튼우드 협정에 따른 안정된 고정환율체제 덕택에 고도성장을 이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사실 NlCS는 신생산업을 보호할 수 있었다. 반면 동유럽과 중유럽의 산업은 분명 보호의 덮개를 벗어 던져야 한다는 끈질긴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서방 경제전문가들과 정부들의 조언은 무억장벽을 없애라는 것이다. 그러나 질질 끌어온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GATT니 우루과이 라운드협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정작서방측도 종종 자신들이 그토록 떠드는 무역장벽제거에 실패하고 있다.유럽공동체(EC)는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와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마저 부분적인 시장개방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체코는 대EC 철강수출에서 기껏 EC 철강시장의 1%를 넘지 않는다는 쿼타에 묶여 있다.

<수출산업 투자 유인>
그렇다면 한국의 석세스스토리는 동유럽과 중유럽의 각국 정부에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지역 국가들은 한국과 같은 성공을 바랄 것이다. 이들은 그러나 NICS가 25년전 직면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장벽에 에워싸여 있다 그런데 한가지 매우 시사적인 대목이 있다. 한국정부는 수출산업투자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한국사업가들은 한국경제가 자신들의 수출제고 노력에 부합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 이 같은 인센티브에 힘입어 그들은 수출산업에 대거 투자, 외환을 벌어들였다. 그 돈은 다시 한국의 생산기반확충에 필요한 각종 제품을사들이는 데 쓰였다. 바로 이것이 성공을 위한 공식임이 입증됐다. 동유럽과 중유럽의 각국 정부가 이 같은 역할을 맡는다면 그 결과도 한국과 같아지지 않을까.
중·동유럽 문제에 한국적 개발방식을 처방하고싶은 유혹을 받지만 그럴 경우 가장 큰 문제를 간과하는 셈이 묄 것이다. 지난 40년의 비효율적 계획에 치여 이 지역의 어느 산업도 한국적 개발전략이 먹힐만한 처지가 안 된다. 잠재력이 있어 세계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는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만을 고른다해도 전반적인 경제회복과 이 지역의 경제성장을 궤도에 올려놓기엔 너무나 그 수가 적다. 정부의 대책도 크게 미흡하다. 전체경제에 경쟁적 시장환경을 창출하기 위해선 대규모투자·구조재편·민영화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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