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회사 1호제품〉모조지 사용 책 두께가 무려10㎝…베개대신 이용되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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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해방과 함께 우리말 우리 글을 되찾게 됐어도 영어를 배우던 학생들은 영한사전이 없어 일어로 된 「삼성당 영화사전」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에서 돌아온 유형기목사 등 몇몇 인사가 나름대로 영한사전을 만들기도 했지만 사전크기가 교과서보다 크고 상업적 기반이 없던 탓에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학생들와 불편은 이를 데 없었고 이후 일어를 잘 모르는 학생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일사전과 일한사전 두개를 지니기 일쑤였다.
당시 대구에서 계몽사라는 대형서점을 운영하던 김원대씨(현회장)가 이런 불편을 없애기 위해 영한사전을 펴내기로 작정했다.
49년부터 편집진을 구성하고 삼성당사전을 모델로 사전편찬작업에 들어갔지만 곧 6·25가 터졌다.
전쟁통이라 사람과 물자 구하기가 어려워 편찬 작업은 예정보다 훨씬 늦어졌다.
게다가 사전은 「인도지」 라는 얇은 종이를 써야 하는데 수입이 중단돼 할 수 없이 모조지에다 인쇄했다.
작업 3년여만인 52년 5월 첫선을 보인 가로 8㎝, 세로 15㎝의 「뉴콘사이스 영한사전」 은 1천2백여쪽임에도 불구하고 두께가 무려 10㎝에 이르렀다.
목침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베개대신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몽침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외형은 보잘 것 없었지만 당시 최고의 영문학자였던 연세대 최재서, 경북대 이규동교수가 감수를 맡아 내용은 거의 완벽했다. 이후 영남일대에서 시작된 콘사이스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콘사이스」 라는 단어는 본래의 뜻을 떠나 영한사전의 대명사로 불렸다. <이효준자>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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