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 | 작년 백만 불 수출…″아버님께 보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육사생도시절 박지만씨는 동기생들과 똑같이 훈련과 기합을 받고 엄한 내무생활을 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박병권 박사 ( 55·육사16기·현 한국해양연구소장)로 『생도시절 내내 따뜻하게 상담해준 은사님』으로 박씨는 기억하고 있다. 국제정치학을 가르쳤던 최창윤 박사(육사18기·현 민자당총재비서실장)역시 『온화한 인품에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강의로 생도간에 인기가 높았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5년 복무 후 전역>
박씨의 육사시절 청와대경호실의 작전차장보를 차례로 지냈던 전두환·노태우 전 현직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았으나 그는 『그분들을 대할 기회도 거의 없었고, 전 현직 국가원수를 거론하는 자체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언급을 피했다.
79년 10·26이 터진 뒤에는 보안사령부의 신상체크가 박씨의 뒤를 따라다녔다.
달라진 세상이 된 81년 봄 그는 방공포병과를 택해 임관, 군복무를 하다 만5년의 의무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했다. 이후 최근까지 여러 사람이 그의 앞길을 걱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중 이철 의원 ( 현 민주당원내총무) 은 박씨에케 꽤 깊은 인상을 심어준 사람 중 한 명. 『이의원님의 선친 (이근진씨·작고 )께서는 제가 중앙고시절 은사님이셨어요. 89년께 인가 한 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의원님을 만나 인사를 드렸지요. 당시 의원님의 선친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됐을 때로 기억되는데, 「상을 당하신 소식을 듣고도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고 인사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후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뜻밖에도 이의원님께서 면회를 오셨어요. 「나도 학생시절 옥에 갇혔던 경험이 있다」며 격려하고 다독거려 주셔서 그저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별도로 저를 위해 석방탄원서까지 내 주셨더군요 』
옥중에서 박씨는 사노맹 활동으로 구속된 한 운동권 청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 사노맹)가 집권하면 최소한 현 권력층 주변은 다 사형이다』는 말에 박씨는 『그럼 그 희생자들의 불쌍한 가족은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했다. 『 과업수행을 위해서는 그 정도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대답에 박씨는 본말이 전도됐다는 생각이었지만 더 이상 토론하지 않기로 했다고 회고했다.『저는 남달리 성장기를 험하게 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격려, 격려 하지만 남부끄러운 일이지 언제까지나 격려만 받아가며 살수 있습니까. 이제야 뒤늦게 자리잡아 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결혼이요? 사람만 나서면 당장이라도 해야지요. 혼자 사는 건 싫어요』

<친지들 맞선주선>
박씨의 친지들은 그간 몇 차례 박씨를 위해 맞선모임을 주선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
그는『지금 사귀는 사람은 없다. 그간 이런저런 소문이 과장되게 돌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 적도 많았다』 고 밝히면서 한가지 에피소드를 전했다. 『군 제대 후 서울시내의 어떤 호텔에 묵고 있을 때였어요. 그 호텔 여주인 되는 분이 제게 유달리 친절을 베풀어 주셨는데, 어느 날 저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더니 청와대에서는 구경조차 못하던 곰 발바닥 요리를 대접해 주시는 거예요. 난생 처음 대한 요리였지만 기름기가 많아 먹기가 곤란하더군요. 그런데 그 분에게 따님이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어요. 아차 싶더군요. 다음날 조용히 호텔을 옮겼지요 괜히 구설수에 말릴까 겁이 났습니다』
추석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9일 박씨가 경영하는 충남금산군추부면의 삼양산업 구내식당에서는 조촐한 자축식이 벌어졌다. 「경축, 월매출 3억 달성」「우리는 해내고 있습니다」는 문구가 벽에 나붙은 가운데 대표이사인 박씨와 생산직직원 10여명이 축하케이크와 맥주, 돼지고기를 놓고 둘러앉았다 이 회사의 지난해 상반기 매출액은 7억5천9백만 원. 올해는 같은 기간 중 14억l천2백만 원을 기록해 무려 86%의 매출신장을 기록했다.
특히 지난6월 2억2천만 원, 7월에 2억8천만 원을 기록한데 이어 8월에는 매출액 3억 원을 처음 돌파, 이날 자축파티가 열린 것이었다
자본금 12억 원의 삼양산업은 박씨가 l6만주(8억 원)를 소유한 대주주이고 쌍용자원·삼화기업·삼화전자가 각각 1만, 3만주를, 그리고 박씨의 둘째 누나인 박근영 육영재단이사장 ( 38 ) 이 2만주를 소유하고 있다.
근영씨는 동시에 이 회사의 감사로 등록돼 있지만 육영재단과 최근 설립된 어린이교통안전협회 (사단법인 ) 의 업무가 겹쳐 남동생의 회사 일에는 간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박지만 사장의 월 급여는 2백만 원.
그는 자신의 업종이 제조업이라는 점과 일본에 수출까지 하고 있다는 점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월급 2백여 만 원>
『62년에 아버님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할 당시 우리 나라의 수출액은 5천5백만 달러 정도였습니다. 15년 후인 77년 드디어 1백억 달러 수출목표가 달성돼 아버님도 몹시 기뻐하셨지요. 지금 우리 회사가 만든 제품은 연간 40만 달러 어치 가량이 일본에 수출되고 있어요. 로컬수출(수출용 원자재납품) 실적까지 합치면 연간1백만 달러입니다. 이 액수는 아버님이 생전에 그렇게도 집념을 갖고 있었던 「1백억 달러 수출목표」의 꼭 만 분의 일인데… 글쎄요. 이런 사실을 갖고 최소한 수출에 있어서 만큼은 제가 부모님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 있다고 해도 되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 노재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