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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에 지나친 압력… 득보다 실”/옐친 방일연기 일본측 반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외교업적 노린 궁택정부에 큰 타격/대러 경제원조·투자 재검토 불가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방일연기를 통보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일본의 전통적인 대러시아 불신감은 더욱 커져 일본의 대러시아 투자나 경제적 지원도 주춤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푼이 아쉬운 러시아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또 러시아는 국제적인 신용실추라는 큰 손실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정권이 입은 타격은 러시아의 그것을 능가한다. 일본의 대러시아외교는 대부분 소위 북방영토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일본은 지난 7월 뮌헨정상회담의 공동선언에 북방영토문제를 집어넣는데 성공한뒤 다음달 구소련지원 도쿄(동경)회의 개최 등을 통해 일본의 경제력을 과시하려 했다. 즉 일본의 협력이 없으면 대러시아지원은 안된다는 정경불가분 원칙의 국제적 인정을 위한 작전을 진행해왔다.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외상이 이달초 러시아를 방문했을때도 경제협력카드를 내세워 옐친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때 옐친대통령은 『영토문제와 별도로 경제원조를 받지 못하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러시아의 이같은 사정을 무시하고 계속 몰아붙인 것이 결국 옐친대통령의 방일 연기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일본 국내에서는 지나치게 옐친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 아니냐는 비판과 러시아의 외교관례에 벗어난 행동에 분노를 표시하는 두가지 반응이 일고 있다.
핵대국 러시아가 독재체제로 복귀하지 않도록 옐친대통령을 돕는 것이 선진국의 과제인데 일본은 국제적 흐름에 역행,자국의 이익에만 집착하려 했다는 비판이다.
옐친대통령의 방일연기 발표후 국제통화기금이 러시아에 대한 지원조건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일본의 자세와 좋은 대비가 된다. 이번 사태로 일본이 국제적으로 입은 체면손상은 크다.
그러나 일본은 일방적인 방일 연기통고를 받은뒤 겉으로는 분노와 실망을 나타내지 않고 냉정한 자세를 견지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식량원조 1억달러와 천연가스 증산용 대러시아 기계수출에 대한 7억달러의 수출보험 인수 등은 예정대로 실행하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에 약속한 것으로 아직 실행되지 않은 것 뿐이다.
옐친대통령의 정치기반 약화는 민간기업의 투자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러시아가 일본에 대해 요구한 산업협력 프로젝트는 에너지·화학·자동차·항공 등 26개분야 1백30건으로 4백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최소한의 거래원칙도 지키지 않는 러시아에 일본기업들이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며 일본과 러시아의 경제교류는 당분간 정체상태를 면치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일본 국내적으로 미야자와 정권이 입은 타격은 상당하다. 미야자와총리는 옐친대통령의 방일에서 북방영토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음으로써 자신의 정권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장기인 외교에서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만회할 길이 없다.
또 러시아 지원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일본만이 괘씸하다고 계속 외면할 수는 없다. 미국과 유럽은 영토문제로 일본과 러시아가 아옹다옹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러시아의 안정을 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이 정경불가분원칙을 저버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럴 경우 이번에는 일본의 내각이 쓰러진다. 미야자와총리가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동경=이석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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