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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건의 SK 창업 비사] 죽음 앞에서도 초연히 일해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1970년대 초반 서울 광장동 워커힐 전경.

1953년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재건한 선경은 60년대로 들어오면서 원료 생산으로, 다시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기치를 내걸으면서 그 도전 무대를 넓혀 나간다. 선경호(號)의 선장이었던 담연(湛然) 최종건(崔鍾建·1926~73)은 그렇게 무(無)에서 유(有)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주 가운데 가장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최종건이 이룩한 경영 신화는 위대한 것이었다.


1970년 가을로 가면서 선경의 경영 여건은 점점 어려워졌다.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을 한꺼번에 건설한 데다, 수원 공장에 버금가는 울산직물을 세우면서 자금 압박이 심해진 것.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연이율 30%에 이르는 사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최종건은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처음에 위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지만 정밀검사를 해보니 위궤양이었다. 이렇게 최종건의 병명이 위궤양으로 밝혀졌는데도, 은행장과 사채업자들이 몰려들었다. 명색은 병문안이지만 여차하면 빌려준 돈을 먼저 회수하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최종건이었다. 그는 환자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조상 대대로 물려온 수원의 선산까지 담보로 들어가 있소. 사재까지 털어가면서 백의종군하고 있는데 내가 쉽게 쓰러질 것 같소?”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도 당장 막아야 할 돈이 1억원가량 됐다. 막 위궤양 수술을 마친 뒤 소식을 들은 최종건이 벌떡 일어섰다.

“어느 은행이냐?”(최종건)

“상업은행입니다.”

자금부에서 은행 업무를 담당하던 홍두표의 대답이다. 최종건은 곧장 상업은행으로 달려갔다. 은행장은 최종건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아니,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고 들었는데, 여긴 어떻게?”

“행장님께서 진작 1억원만 막아주셨으면 이렇게 급히 오지 않지요.”

한 손으로 수술 부위를 움켜쥐고 있던 최종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어서 1억원만 막아주시오. 그러면 수술 부위도 씻은 듯이 나을 테니까.”

최종건은 특유의 여유를 되찾고 껄껄 웃고 있었다. 이런 열정에 은행장이 두 손을 들 수밖에.

한편으로 최종건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에 나선다. 자신은 그룹 전체를 이끄는 선경그룹 회장이 되고 선경직물 사장에 최종현을 임명했다. 또 해외섬유 사장에 김영환, 울산직물 사장에 김덕유, 선산섬유 사장에 최종현을 선임했다. 70년 12월의 일이다.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당시 선경직물은 2300여 명의 직원이 1200대의 직기를 가동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생산원가도 뽑아내지 못하는 구조였다. 최종현은 “직기 800대에 1800명이 적정 수준”이라고 보고했다.

구조조정을 위한 인력정비위원회가 꾸려졌고 위원장에 공장장 이강석이, 부위원장에 국세청에서 온 한상설이 기용됐다. 인원 감축의 칼자루를 쥔 한상설은 3개월간 감원 조치를 단행해 1차로 500명, 2차로 600명의 종업원을 줄였다. 이렇게 인원 감축이 한창일 때 최종건이 한상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한상설)

“너 흥순이 남편 살려놔.”(최종건)

“흥순이가 누군데요?”

“왜 우리 수원집 식모 있잖아.”

최종건은 남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렇게만 말을 이었다. 사실은 수원에 계시던 최종건의 모친이 “흥순이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방법이 없겠느냐”며 연락해온 것이다. 효심 지극한 최종건이 한상설에게 전화를 넣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탁을 한상설은 단칼에 잘랐다.

“안 됩니다.”

“왜 안 되나. 내가 지금 직원 한 명 떼었다 붙였다 못해서 너한테 사정하는 줄 아나.”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

원칙이 무너지면 말썽이 난다는 것이었다. 오너 경영인의 민원을 무 자르듯 잘라버린 한상설의 배짱도 배짱이지만, 일단 맡기면 믿고 보는 최종건의 배포도 대단했다. 이런 원칙 경영 덕분이었을까. 71년 선경직물은 1800만 달러어치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면서 보란 듯이 재기한다. 그 전에 833만 달러였던 것에 비하면 두 배가 넘는 성장이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선경에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닥쳤다. 71년 12월 25일 대연각빌딩에 불이 난 것. 대연각빌딩은 극동건설 김용산 회장이 69년 준공한 21층짜리 초고층 건물. 선경직물·선경화섬·선일섬유·선산섬유 등 주요 계열사의 서울사무소가 입주해 있던 선경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사고가 났을 때 최종건은 일본 출장 중이었다.

사고 다음날 최종건은 회사로 돌아와 사고 수습에 나선다. 금고 속의 현찰과 수표가 모두 불타버렸다. 유가증권도 문제지만 재생할 수 없는 신용장 기록 장부가 다 들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김용산 챙기기’에 온 힘을 다했다.

화재 사고로 사장이 구속된 극동건설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최종건은 김용산을 대신해 이사회를 주관하고 굵직한 사업을 직접 결재하면서 자기 회사처럼 극동 일을 도와줬다.

▶용인 SK아카데미에 있는 고(故) 최종건 동상.

배포 큰 오너, 배짱 있는 이사

대연각 화재로 뜻하지 않은 손해를 본 최종건은 새로운 활력소를 찾고 싶었다. 이때 매물로 나온 것이 서울 광장동의 워커힐호텔이다. 최종건이 정부 소유의 워커힐을 매각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72년 12월 초. 62년 12월 건설된 워커힐은 교통부 산하 국제관광공사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10년 내리 적자 신세였다.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워커힐을 민간에 팔기로 한 것이다. 최종건은 워커힐 인수를 통해 전환기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인수 과정에서 최종건과 최종현이 마찰을 빚는다.

“전혀 업종이 다른 호텔을 인수해서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최종현)

“워커힐은 여느 호텔과 다르다.”

“다르다고 해도 결국 숙박업인데, 섬유업인 선경이 호텔을 경영한다는 것이 걸맞지 않아요.”

“사업을 크게 하자면 이것저것 다각적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호텔은 그날그날 현찰을 만질 수 있는 사업이야.”

“지금 워커힐에 손님이 듭니까.”

“그것은 누가 경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당시 워커힐의 내정 가격은 19억5000만원. 이미 한진그룹에서 관심을 보인 상태였다. 그러나 한진 측은 내정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매수대금의 20년 분할 납입을, 정부에서는 10년 분할 납입을 주장하고 있었다. 양측이 샅바싸움을 하고 있을 때 최종건이 나섰다. 내정 가격보다 비싸게, 그것도 일시불로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내용을 김신 교통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그럼 선경에 매각하시오. 선경의 최 회장은 아무 일이나 성실하게 잘 해내는 사람 아니오”라고 응원해준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결재서류 빈칸에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호텔로 발전시킬 것’이라는 메모까지 써서 보낸다.

이 말 한마디에 워커힐의 새 주인은 선경으로 바뀌었다. 73년 1월 중순 워커힐 공개 입찰에서 최종건은 26억3200만원을 써냈다. 10억원은 일시납, 나머지는 10년 분할 납입하는 조건이었다. 이 회사는 73년 3월 16일 상호를 ‘선경개발 워커힐’로 바꿨다. 73년은 선경직물을 설립한 지 20년 되던 해였다. 최종건으로선 그룹 확장을 위한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다.

워커힐 인수 직후 최종건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갑자기 체중이 10㎏이나 빠지면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이다. 위궤양 수술을 집도한 서울대병원 내과의 한용철(전 서울대병원장)에게 연락을 했다. 가슴 X선 촬영을 해보니 오른쪽 폐에 이상 징후가 보였다. 폐암 가능성이 높았다.

기관지 촬영과 기관지성 검사를 해보니 이미 암세포가 기관지까지 퍼져 있었다. 한용철은 최종건 대신 최종현을 불렀다. 최종현은 ‘진단 결과가 나왔으면 본인에게 알려줄 일이지. 왜 나를 보자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으로 한용철을 찾았다. 동생을 부른 이유는 이미 수습할 시기가 지났다는 뜻이었다.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한용철)

“많이 안 좋으신가요?”(최종현)

곧장 최종건은 미국 보스턴의 월리드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미국행을 수행한 유석원이 “기관지가 나빠진 것이다”며 임기응변으로 넘겼지만 이미 최종건은 모든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폐암 진단이 떨어지자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미국에 간 지 채 스무 날이 안 돼서다.

▶고 최종건 회장 영결식 모습.

“큰 도량으로 죽음 대해”

한국에 돌아온 그는 73년 7월 1일 선경석유 주식회사를 세운다. 내심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목표를 정한 최종건이었다. 선경석유는 정유회사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데이진과 손잡은 최종건은 온산 일대 100만 평 규모에 석유사업 단지를 조성하겠다는 내인가를 받는다.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 공급 확약도 따냈다. 그토록 바라던 석유 사업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야심 찬 계획은 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 발발로 벽에 부닥친다.

몸도 나빠졌다. 73년 9월 최종건은 서울대병원에 다시 입원한다. 환자복을 입고도 그는 변함없이 회사 일을 챙겼다. 수시로 드나들던 김용산과는 허물없는 얘기를 나눈다.

“뭘 하느라 어제는 안 왔냐.”(최종건)

“그놈의 은행 막느라 그랬다.”(김용산)

“은행은 밤중에도 막냐.”

“밤에는 자야지. 인마.”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내가 죽고 나거든 내 동생 종현이를 나라고 생각해다오.”

“…자식.”

병석에서도 그는 석유사업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면회객마다 “나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사업이 있는데, 그게 석유사업이다. 내가 못하면 너희들이 꼭 해다오. 종현이를 도와서 꼭 좀 석유사업을 해줘”라고 말하는 게 인사였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초연했다. 차남인 신원(SKC 회장)이 해병대 복무 중 면회를 왔을 때도 그는 담담했다. 최신원은 초췌해진 아버지를 보면서 작게 흐느꼈지만 최종건은 “나는 괜찮다. 군복이 잘 어울리는구나”하면서 의젓하게 맞아주었다. 이때 최종건의 주치의였던 한용철은 “그렇게 큰 도량으로 죽음을 대한 환자는 없었다”고 회고한다. 생전의 한용철이 전하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다.

“지난해 여름 암인지 의심을 하고도 확진을 못했습니까?”(최종건)

한용철은 우물쭈물했다.

“일본에서 개발된 화이버 스코프가 있다면 기관지 구석구석까지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가진 기관지경으론 가시 범위가 좁아서 확실한 진단을 할 수 없습니다.”

두어 주일 지나서 한용철 앞으로 소포가 배달됐다. 화이버 스코프였다. 최종건은 “나는 이미 늦었지만 나와 같은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기증한다”고 했다. 한용철은 “이것이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본 최종건의 말이었다”고 말했다.

11월 초순 일요일 아침엔 최종건·종현·종관·종욱 네 형제가 병실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그해 2월부터 선경의 단독 후원으로 방영되고 있는 MBC ‘장학퀴즈’였다. 소재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선경은 광고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광고비를 억제한다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기도 했다. 그런데 장학퀴즈만은 예외였다. 기업 홍보가 아니라 인재 양성을 위한 미래지향적 투자 사업으로 여겼던 것. 장학퀴즈가 끝나자 최종건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 프로그램 잘했어”하며 만족해 했다.

“집안에서 장학퀴즈 ‘장원’ 나올까”

“덕분에 선경 이미지가 많이 올라가고 있어요.”(최종관)

“맞다. 종현아 장학금 좀 더 올려주면 안 되겠니?”(최종건)

“연구해보죠.”(최종현)

“우리 집안에서도 장차 장학퀴즈에 나가 장원할 녀석이 있을까.”(최종건)

“창원이가 있잖아요.”(최종관)

“글쎄 커봐야지.”(최종건)

최종건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이때 장남 윤원(전 SK케미칼 회장)은 미국 유학 중에 있었고, 차남인 신원도 해병대 복무 중이었다. 총명하기로 소문난 막내 창원(SK케미칼 부회장)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렇게 껄껄 웃던 최종건은 며칠 뒤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73년 11월 15일이었다. 향년 48세, 폐허 속에서 이뤄낸 선경그룹을 동생 최종현에게 맡긴 채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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