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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생각은…

'뇌물 미술대전' 존재이유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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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돈 주면 뽑히고, 돈 안 들이면 떨어지는 '유전특선, 무전낙선(有錢特選, 無錢落選)'의 삭막한 그림 세상이 됐다. '대통령상'이래 봐야 6000만원쯤이면 되고, 입선.특선 같은 건 500만원에서 2000만원까지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문화계까지 검은 돈과 뇌물로 상까지 팔고 사는 '매상매상(賣賞買賞)'식 세태에 오염된 것이다. 벼슬자리를 팔고 사는 '매관매직'은 정치판에서 귀에 익은 말이지만 상조차 돈으로 거래하는 건 아무래도 생뚱맞다.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 돼야 할 대한민국 미술대전은 이미 그 권위가 바랬다고는 하지만, 현재 수백 개의 공모전 가운데 국민 세금인 문예진흥기금을 지원받는 유일한 연륜있는 대규모 대회라고 한다. 그런 대회에서 이 정도라면 다른 공모전은 어떨지 아찔하기만 하다.

그림은 좋은데 돈 없는 인재가 빛을 못 보는 반면, 재주 없이 돈만 있는 둔재가 상을 받는다는 모순은 천민자본주의의 폐해다. 이런 비리의 심각성은 창의성.상상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21세기에 바람직한 인재의 진출을 막는다는 데 있다. 또한 시각예술문화 전반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제대로 된 인재와 '짝퉁'이나 '함량 미달'의 사이비가 뒤섞여 옥석 구분조차 어려우면 결국 작가 간의 상호 불신과 편 가르기 등이 횡행하게 마련이다. 공모전의 신뢰도 땅에 떨어지고, 오래 전 수상자들의 명예에도 먹칠을 한 셈이다. 이야말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내쫓는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미술계에도 통용될 판이니 딱할 노릇이다.

이번 사건은 특히 조직적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과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공모전 비리와 부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해묵은 종기'였다. 급기야는 곪았던 게 터졌고, 썩은 냄새 풍기며 쉬쉬하던 게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이다. 이젠 충격 속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아야 한다.

첫째 편파 심사와 돈 거래 시비로 시끄러운 각종 공모전은 더 이상 열리지 말아야 한다. 능력 있고 깨끗한 인재의 활로를 막고 예술 신인의 발목을 잡는 공모전은 공개모집의 기본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둘째 심사위원의 자질도 문제다. 떼거리 코드식 나눠먹기나 출품자의 그림을 대신 그려 주는 심사위원이라면 작품의 예술성보다 잿밥에만 관심을 가질 게 당연하다. 선진국처럼 외부 전문가도 다양하게 구성해 객관적인 견제의 균형을 꾀해야 한다. 셋째 공모전 일변도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과거 권위주의적 발상인 대통령상부터가 그렇고, 각종 경력 평가에서 개인전.그룹전보다 공모전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간판 따지기식' 관행을 수정해야 한다. 공모전 병역특례 혜택도 신중해야 한다. 각종 공모전에 혈안돼 휴학까지 하는 대학생이 늘고 있다는 요즘의 심상치 않은 열기도 사회병리 현상이다. 수상만을 위한 출품은 자연스러운 평상심이 아니라 욕심일 뿐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말처럼 치열한 정진 끝에 상이 따라오는 게 순리다.

'개인전 열자니 통장이 울고 공모전에 내자니 학연이 운다'는데, 공모전에 또 통장까지 울게 생겼나 보다. 학연.지연에 얽히고설킨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공정성 잣대의 기본은 공모전 출품자와 심사자의 깨끗한 마음과 상호 신뢰에 있다. 그 밖의 어떤 예방 시스템도 완벽할 수 없다.

유한태 숙명여대 교수 디자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