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그린스펀 효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그가 발언하면 모두가 경청한다." "세계시장을 움직이는 말의 힘."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9년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재임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앨런 그린스펀의 영향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99년 데이비드 시실리아와 제프리 크뤽센크는 그린스펀의 발언이 시장에 미치는 효과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대부분 그의 발언이 의도했던 쪽으로 시장이 움직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그린스펀 효과(The Greenspan Effect)'다. 대표적인 예가 그의 취임 직후 벌어진 주가폭락 사태다. 그는 87년 8월 뉴욕 증시의 주가가 폭락해 금융위기의 조짐을 보이자 "미 연방준비은행(중앙은행)은 필요한 모든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는 발언으로 단번에 시장을 안정시켰다. 96년 정보기술(IT) 주식의 거품으로 주식시장이 과열양상을 보였을 때는 유명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란 경고로 무분별한 투자에 제동을 걸었다.

그린스펀은 결코 단정적이거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알듯 말듯 한 모호한 표현을 써 시장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했다. 오죽하면 한 신문이 "그린스펀만큼 월가를 완전히 헷갈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기사를 썼을까. 그린스펀 스스로도 "내 말이 분명한 것처럼 들린다면 아마도 내가 한 말을 잘못 이해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래서 월가에는 그린스펀의 발언을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분석가가 나오고, 심지어 '그린스펀 어법(Greenspanology)'이란 용어까지 생겼다.

퇴임 후 강연과 자문을 하고 있는 그린스펀이 최근 과열양상을 보이는 중국의 주식시장에 대해 재임 시와는 달리 단정적이고 직설적인 경고를 발했다. "분명히 지속가능하지 않고 극적인 하락을 겪을 수 있다"고. 처음에는 '그린스펀 효과'가 나타나는 듯했다. 중국 금융당국이 수차례나 '이상과열'을 경고해도 상승세를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던 중국 증시가 그의 발언 직후 하락한 것이다. 그러나 웬걸, 개미군단까지 가세한 중국 증시는 하루 만에 다시 오름세로 돌아섰다. 그린스펀의 경고도 중국인들의 왕성한 투자 열기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왕년에 세계 금융시장을 좌우하던 그린스펀도 퇴임 후에는 역시 약발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린스펀 효과'도 결국은 FRB 의장이란 자리가 만든 거품은 아니었을까.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