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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 32개월… YS 집권당 총재되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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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투쟁으로 쟁취한 「고지」/반김·내각제세력과 대담·무모한 정면 대결/마산행·제주행·탈당카드 등 강공으로 돌파
김영삼대표가 민자당내 소수계파의 보스로 3당합당후 2년8개월에 걸친 기나긴 권력투쟁 끝에 28일 마침내 집권당 총재직을 거머쥐었다. 그는 형식상 여당 총재로 승계됐지만 사실상은 피나는 쟁투끝에 빼앗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90년 1월22일 3당합당은 그의 정치평생을 통해 무모함과 대담성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당이 없었다면 그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88년 13대총선에서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이 제3당으로 전락,정치중심권에서 배제되자 김 총재는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합당을 감행했다. 합당후 2년8개월은 당내의 내각제추진세력 내지 민정계로 대표되는 반김세력과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각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노태우대통령에 대해 내각제를 하루빨리 용도폐기시켜 대통령제를 기정사실화하려 했던 김 대표의 「항전사」나 다름없다.
김 대표는 합당되자마자 시작된 민정·공화계의 YS고사작전속에서 특유의 「싸움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여권의 1인자인 대통령에게 다소곳이 순종하고 점지를 기다리는 「작은 2인자」 보다는 끝없이 탈당카드로 위협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 이기는 방식을 택했다. 내각제 각서파동과 신공안정국,유엔정국과 통일정국속에서 때로는 마산행과 제주행을 감행하기도 하고 야당 또는 당내부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원하던 바를 쟁취했다. 그는 합당후 후보경선때까지 노 대통령에게 「각하」 호칭을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
합당직후인 90년 3월 방소후 박철언정무1장관이 『나라를 망칠 사람』이라고 비난하자 당무를 거부,탈당위협끝에 박 장관을 사임시켰다. 그해 10월 내각제 합의각서가 보도돼 자신의 도덕성까지 타격을 받자 또다시 당무를 거부,마산에 내려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불행한 말로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며 노 대통령과의 공멸카드를 앞세워 협박했다. 노 대통령도 이례적으로 『마산에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지 의미를 부여할게 없다』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결국 『국민이 반대하는 개헌은 하지 않는다』고 물러서고 말았다. 궁지에 몰릴 때는 예측불허의 독자선언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91년 6월 광역의회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입지가 약해진 김대중신민당총재가 노 대통령과 회동,내각제 불씨를 살리고 유엔의 남북한동시가입행사에 수행할 뜻을 밝혔다. 또 박태준최고위원이 민정계 관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김 대표는 제주도 휴가중 전격적으로 경선수용의사를 밝히면서 총선전 후계구도 가시화를 요구,결국 청와대로부터 「연말까지 정치일정 논의중지」라는 타협안을 얻어냈다.
민자당이 14대 총선실패후 그의 인책론을 제기할 기미를 보이자 또다시 경선출마를 느닷없이 선언해 국면전환을 해버렸다. 김 대표의 깜짝쇼에 노 대통령이 노발대발하는 바람에 김 대표는 한참동안 노 대통령 무마에 애를 먹기도 했다.
때로는 김대중대표나 정주영국민당대표에게 기대어 궁지를 벗어나기도 했다. 90년 12월 노재봉총리­박철언체육청소년부장관 등 노 대통령 친위부대가 전면에 나서고 91년 1월 국회 상공위 뇌물외유사건,2월 수서사건 등으로 정치권에 엄청난 한파가 몰아치던 소위 신공안정국이 조성되자 강경대군 사망사건을 계기로 김대중평민당총재와 손잡고 노 대통령을 압박,노 총리를 퇴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앞서 양김회담을 노 대통령의 본거지인 대구에서 성사시켜 내각제와 공안통치 배척이란 합의문을 발표,노 대통령에게 정면도전했다.
또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초까지 총선전 대통령후보 결정을 내세우며 『나는 더이상 잃을게 없다』고 비장한 각오를 내비친적이 있다. 그때 그는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과 통화하면서 『당을 깨고 나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후일 『당시 김 대표에게 도청된다는 암시를 여러번 주었으나 김 대표가 일부러 무시하는 것같았다』며 도청을 역이용해 대통령을 위협하더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김 대표에게 한편으론 겁내면서 다른 한편으론 끊임없이 다른 선택이 없는지 대안을 모색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김 대표는 결국 투쟁을 통해 내각제를 포기시키고 노재봉총리 후계구도를 차례차례 좌절시키면서 집권당의 대통령후보와 총재직을 모두 움켜쥐었다.<김두우기자>
□김 총재 권력투쟁 일지
▲90.1.22 3당합당,내각제 추진 및 14대총선후 당권이양 약속.
▲90.4.6 박철언의원의 「제2정계개편론」과 방소때 갈등으로 1차 당무거부로 박 의원을 정무1장관에게 사임케 함.
▲90.5.6 내각제 각서 서명.
5.9 1차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 지명됨.
▲90.10.24 내각제 연내공론화 유보.
10.25 중앙일보,내각제 각서 보도파동으로 2차 당무거부 및 마산행.
11.6 청와대 회동에서 주례청와대 회동·내각제 개헌포기 등을 얻어냄.
▲91.4.1 양김 대구회동에서 내각제 반대,공안통치 반대 합의.
5.24 강경대군 사망사건 터지자 김대중신민총재와 손잡고 노재봉총리 사임케 함.
▲91.8.1 제주행에서 「총선전 후계구도 가시화」 요구하며 경선수용의사 밝힘.
8.16 연내정치일정 논의중지 합의.
▲91.11. 선후계구도 가시화 공세 재개.
▲92.1.9 청와대회동에서 「총선후 전당대회」 수용.
▲92.3.24 민자당의 총선패배로 김 대표에 대한 인책론 제기
3.28 경선출마 전격 선언
▲92.5.19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 됨.
▲92.8.20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경으로 결정됐으나 반대.
▲92.8.25 노 대통령,총재직 사임.
▲92.8.28 중앙상무위서 총재로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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