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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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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거미'에 이은 '해적'의 공세가 거세다. 한국 영화가 거미줄에 묶이고 해적에게 꼼짝없이 당하는 형국이다.

'스파이더맨 3'에 이은 할리우드 대작 '캐리비안의 해적 3'의 흥행세가 가파르다. 23일 개봉해 이틀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넘었다. '괴물'이 세운 최단기간 100만 돌파 기록을 깼다. 스크린 수는 860개. '스파이더맨 3'의 스크린 최고 점유 기록(816개)도 깼다. 독과점 논란도 다시 나오고 있다.

할리우드 대작들의 잇따른 선전에 충무로의 위기감은 깊어지고 있다. '슈렉 3' '다이하드 4' '해리포터 5' 등 화제작이 대기 중인 반면 우리 영화는 마땅치 않은 탓이다.

칸영화제 붉은 카펫을 밟은 '밀양'도 '캐리비안'의 공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같은 날 개봉했으나 성적은 이틀새 13만 명에 그쳤다. 여기에 칸 마켓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들이 있다. 한국 영화 거래가 끊겼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시름이 깊어간다.

'밀양'은 극한으로 내몰린 한 여자를 통해 삶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영화다. '밀양(密陽)'의 영어 제목 '시크리트 선샤인(Secrete Sunshine)'이 키워드다. 절망뿐인 생을 이어가게 하는 비밀의 빛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거다. 맑은 하늘의 빛으로 시작한 영화는 마당 한 켠 진흙탕을 내리쬐는 빛으로 끝난다. 지독하게 불행한 여자지만 어쨌든 생명을 받은 자는 살아야 하며, 생명 자체가 삶의 비밀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칸은 이창동의 진지한 연출과 전도연의 호연에 호평을 내놓고 있다.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매료됐다는 배우 송강호의 말도 인상적이다. "흥행은 모르겠다. 하지만 '밀양'이 있어 영화인이자 관객으로서 행복하다. '밀양'은 우리가 왜 영화를 하며, 영화란 우리 삶에 무엇인가 돌아보게 한다. 그게 흥행보다 더 중요하다."

'밀양'에 대해 가장 비문화적 태도는 개봉 이틀간 든 13만 명을 대수롭지 않은 수치로 무시하는 것이다. 관객 수가 109만 명('캐리비안')의 10분의 1이니 가치 역시 10분의 1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계량화의 함정이다. 관객 수나 흥행 수익 등 숫자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영화의 모든 것이 돼 버리는 것이다. 영화의 보다 진정한 가치는 109만 명이든, 13만 명이든 영화를 본 관객 하나하나에게 그 영화가 어떤 의미로 남았는가가 아닐까. 송강호도 그런 얘기를 한 것 같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