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걷기 = 삶의 질 향상" 미국도 '워크홀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미국 뉴욕주 라운드 레이크시 교외 숲 속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캐피털 시민체육클럽(ESCV)이 주민을 대상으로 매주 열고 있는 '수요걷기대회'의 모습. 가벼운 차림의 남녀가 숲길을 따라 경쾌하게 걷고 있다. 미국에선 1960년대에 도입돼 현재 미국시민체육연맹 주도로 350여 개 클럽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라운드 레이크(미 뉴욕주)=남정호 특파원

5월의 싱그러운 풀향기가 가득한 23일 오전 미국 뉴욕주 라운드 레이크시 교외 숲 속. 눈부신 햇살 속에서 간편한 옷차림의 남녀 70여 명이 숲 속 길을 따라 경쾌하게 걸었다. 여기저기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인근 주민으로 이뤄진 '엠파이어 스테이트 캐피털 시민체육클럽(ESCV)'의 '수요걷기대회'다. 회원들은 노란 민들레 꽃밭과 호숫가를 지났다. 10km쯤 걷자 1847년에 지었다는 고색창연한 교회가 나타났다. 선두에 섰던 안내자가 교회의 역사와 파이프 오르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로써 2시간짜리 도보 여행이 끝났다.

장 반 브랜켄이란 참가자는 이 행사를 두고 "기록도 경쟁도 없는, 건강과 즐거움만을 위한 걷기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이제는 미국 문화의 하나로 확고히 뿌리내린 '걷기 모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폭넓게 확산한 걷기 운동=미국 걷기 운동의 본산은 텍사스주에 본부를 둔 미국시민체육연맹(AVA)이다. 미 전역에 ESCV와 같은 350여 개의 클럽을 산하 단체로 두고 있다.

땅이 넓어 자동차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 걷기 운동이 퍼지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ESCV의 데이비드 스키너 회장은 "걷기 운동은 원래 유럽에서 발달한 것"이라면서 "미국에선 유럽에 파견돼 근무하다 현지의 걷기 운동에 매료된 미군들이 귀국하면서 군 부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걷기 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군부대가 많은 텍사스주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도입된 미국의 걷기 운동은 건강 챙기기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자연 각지에 사회체육클럽이 설립됐고 회원들도 늘었다. 이 연맹 회원관리자인 린다 레브만은 "현재 AVA 활동에 참여하는 인원은 4만2000여 명"이라며 "언론 및 각 사회단체 등에서 걷기의 중요성을 대대적으로 홍보, 동호인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다양한 걷기 프로그램=걷기는 자칫 지루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보다 재미있고, 유익하게 걷도록 여러 방법이 마련돼 있다. AVA의 경우 우선 회원들에게 '걷기 수첩'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AVA가 인정한 걷기 대회를 마치면 어디에서, 얼마큼 걸었는지 표시해 준다. 나중에 어디를, 얼마나 걸었는지 되짚어 보면서 만족감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걷는 장소도 다양하다. '필라델피아 걷기' 등 역사 탐구 코스도 있고, 뉴욕 맨해튼 중심가 산책처럼 관광을 겸한 것도 있다. 이 밖에 '개구리 관찰 코스''단풍 관광 코스' 등 미 전역에 수천 개의 다채로운 걷기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이 수도인 워싱턴 DC와 50개 주의 주도를 도보로 돌아보는 '51 캐피털' 코스다. 기회 닿을 때마다 각 주의 주도를 방문, 역사적 유적지를 도보로 탐방하는 게 이 프로그램의 골자다. 일부 극성 동호인은 아예 장기 휴가를 내 주도를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대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주도들을 모두 찾고 있다. 스키너 회장은 "나는 1989년에 시작해 17년 만인 지난해에 모든 주도를 탐방했다"고 밝혔다.

전문 도보 안내자가 여러 명을 인솔해 걷는 '가이드 코스'도 있고, 혼자서 AVA가 제공하는 지도를 보며 걷는 '셀프 가이드 코스'도 있다. AVA에 따르면 미 전역에 1400여 개의 셀프 가이드 코스가 마련돼 있다.

◆ 각계에서 이는 걷기 운동=미국의 걷기 문화는 단순한 스포츠.레저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비만.질병은 물론 소외 등 사회적 병리를 고치는 특효약으로도 대접받고 있다.

실제로 미국인의 최대 사망원인으로 꼽히는 심장질환을 막기 위해 미 심장병학회는 '스타트, 워킹'이라는 걷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학회는 웹사이트에 '미국 내 걷기 좋은 곳 350선'이라는 안내 자료를 수록해 두고 심장병 환자들에게 걷기 운동을 독려하고 있다.

비만, 특히 소아 비만을 줄이기 위해 각 학교도 걸어서 등교하는 것을 권장한다. 이와 관련, 각 지역 교육위원회에서는 일 년 중 한 주를 '도보 등.하교 주간'으로 정해 가급적 걸어서 등.하교를 하도록 학생들을 독려한다. 걷기는 소외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준다. 온종일 한마디도 못하는 독거 노인들에게는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도 소중할 것이다. 걷기 운동은 때론 자선모금 수단으로도 요긴하게 쓰인다. 미 전역에서는 '암 퇴치기금 마련''빈민 구호기금 마련' 등 수많은 걷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