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27. 1972 일본오픈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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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72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필자의 최종 성적표.

1972년 일본오픈 때 갤러리가 엄청나게 많았다. 매일 1만명이 넘는 갤러리가 모였다. 1번 홀 티잉그라운드 바로 옆에 있는 2번 홀 그린 쪽에서 "와!"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골프장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큰소리였다. 한마디로 난리가 난 것이었다. 모든 초점은 내게 맞춰졌다. 1라운드 공동선두였던 나는 순식간에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엄청난 행운 덕에 나는 2라운드에서도 4언더파 68타를 쳐 중간합계 8언더파로 3라운드를 맞이하게 됐다.

내 기세는 3라운드에서 조금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나는 기운을 잃지 않았다. 거의 모든 갤러리가 일본 선수들, 특히 점보 오자키를 응원했지만 내게도 응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일동포 김태성씨가 중심이 된 한인 응원단이었다.

나와 동갑내기인 김씨는 나고야에 살았다. NHK 중계를 보다가 내가 1라운드 공동선두에 나서자 친구들과 나고야에서 신칸센을 타고 도쿄를 거쳐 대회 장소인 이바라기현까지 왔다.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아들도 데리고 왔다"고 했다.

여관에 묵으면서 응원해준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나를 위해 먼 곳에서 응원을 온 동포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경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3라운드에서 나는 지쳤다. 1주일 이상 제대로 먹지 못해 체력도 달렸다. 버디 2개, 보기 1개로 1언더파 71타를 쳤다. 3라운드에서 6언더파를 친 태국의 온샴과 중간합계 9언더파로 공동선두를 이뤘고, 오자키가 7언더파로 3위였다.

드디어 마지막 4라운드가 시작됐다. 10월 1일이었다.

챔피언조에서 나와 온샴, 그리고 오자키가 출발했다. 그날 갤러리는 마스터스대회 못지않았다. 1만5000명 이상 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NHK가 중계를 시작하고, 일본 수상이 우승컵을 내놓은 덕분에 일본오픈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오자키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출신의 프로골퍼다. 70년 프로골퍼가 된 오자키는 181cm의 장신에다 야구로 다진 체력.기술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샷을 날렸다. 나보다 30~40야드를 더 보냈다. 감나무채로 300야드를 때려내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일본인 갤러리는 내 샷이 러프 쪽으로 가면 "발로 차버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김태성씨를 비롯한 나의 응원단은 "골프는 신사 스포츠다. 안 된다"며 일본인 훼방꾼들을 감시했다. 김태성씨와는 몇 년 전까지 연락을 했었는데 최근 소식이 끊겼다.

오자키의 팬들은 한마디로 광적이었다. '점보 군단'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오자키의 공이 러프로 들어가면 발로 차서 페어웨이로 옮겨놓는 등 비신사적 행동을 일삼았다. 마치 미국에서 '골프황제'로 군림했던 아놀드 파머의 응원단인 '어니스 아미'가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응원을 하고 있었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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