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직 교수 주제발표(요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조국이 해방된 직후 정계 제1인자로 등장한 몽양 여운형은 해방된 민족의 촉망의 대상이었고, 그가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는 독립된조국 건설을 위한 유일한 기관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나 몽양은 불과 2 주일후인 8월31일 사표를 제출했다.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라는 점에서 몽양과 공산당원들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몽양의 이념과 공산당원들간에는 또하나의 메울수 없는 졔곡이 존재했는데 몽양은 민족의 이익을 위주로 하는 민족주의자였던 데 반해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주로하는 국제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
건준초기에 몽양의 측근들중에는 최용달·이강국·박문규등 경성제대출신 3총사와 서울파의 정백등 공산당출신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몽양어 공산당의 정예 분자들을 동원. 건준의 핵심므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몽양이 상해시절 부터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된 그낱 공산당 출신 동지들이 그를 에워싼 것은 당연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뉴스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온다는 소식은 몽양 뿐만 아니라 과거 공산당에 관여했던 많은 인물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9월3일까지 모든 조선사람들은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될 것이라는 것을 보고 있었고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몽양어나 공산당원들이 38선을,아니면 한강을 경계로 한반도가 분할될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면 해방정국의 양상은 많어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의 마지막 발악보다 훨씬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공산당의 체제 정비였다.전열을 정비한 재건과 공산당은 건준에 참여하고 있던 당원들을 통해 건준의 노선자체마저도 장악하게 된다.8월22일 단행된 건준의 간부진 확장개편은 조직부장 정백의 작품이 었다고 보는게 틀림없을 것이다. 조직표상으로 볼 때 몽양계는 사무직과 문화, 안재홍계는 경제분야를 담당한데 비해 서울계는 조직과 조사를 맡았고 재건파는 치안과 건실을 맡았다.전체적으로 공산당의 배경을 가진 간부가 27명중 13명이었다.
이와함께 커다란 변화는8월28일자로 돼있는 건준선언문의 내용이다. 이 선언문은 건준을「모든 진보·민주주의적 제세력」이라고 규정지었다.몽양은 자본가·민주당·공산당을 포함한 모든세력의 대동단결을 주장했지 소위「진보적」세력만의 단결을 주장하지는 않았었다.
몽양은 이 선언을 인정함으로써 지주·자본가, 그리고 그들과 단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이른바 소부르좌 인텔리들을 적대시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몽양은 왜 자기의 이념과 상반되는 공산당측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인가. 몽양이 성격상 주변 사람들의 말을 잘 발아들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해석이있다. 그러나 몽양이 공산당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성격 및 이념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것이라는 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공산당과의 협동은 불가결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몽양이 생각하고 있던 대동단결이라는 용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건준은 실패작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건준을 민족 대동단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결과만을 놓고 몽양의 노력과 건준을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