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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왕”되새길때/이상일(평기자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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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업이 품질좋고 값싼 물건을 만들며 아프터서비스 등 소비자에 대한 예우도 깍듯하다면 장사 안될 이유가 없다. 학자들은 아무리 무역장벽이 높아도 이런 기업의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접근을 차단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상품·고객은 사실상 국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비자를 「왕」으로 극진히 모시고 있는 일본기업의 행태를 보면 「왕」에 대한 「충성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다. 지금 일본기업들 사이엔 CS(Customer Satisfaction·고객만족)라는 말이 대유행이다. CS란 「고객 만족도 극대화」를 최우선 순위로 삼는 경영 철학을 말한다.
○일사,고객만족 최우선
이에 따라 일본기업들은 CS위원회다. CS추진실이다,SC기획실 등의 기구를 앞다퉈 만들고 그 기능을 강화하느라 법석을 떨고 있다. 오랫동안 국제경쟁력을 키워온 TQC(전사적 품질관리)도 생산자위주의 개념이라며 폐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제 품질관리는 기본이며 변화무쌍한 고객의 욕구를 제때제때 포착,시원스레 풀어주는 것이 기업의 과제로 등장한 셈이다.
소니사는 올가을 내놓을 신형 8㎜ 비디오카메라 포장상자에 「충전지와 AC(교류) 전원은 별도 판매」라는 안내문을 눈에 띄게 명기하기로 했다. 이는 이 회사의 CS추진본부가 지난 6월 제출한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보고서 골자는 이렇다.
비디오 카메라 신제품의 경우 89년부터 전원부품을 따로 팔아왔으나 이 사실을 사용설명서에서만 안내했다. 그러나 설명서를 속속들이 읽어보는 고객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상자를 풀고 나서 우선 전원부품이 없는 것을 알고 당황하게 되고 부품을 구입하기 위해 또한번 번거로운 나들이를 해야할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점을 간과한 것은 「팔면 그만」이라는 생산자 논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니사는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이 점을 개선하기로 한 것이다.
○망신당한 「우수상품」
반면 한국기업의 고객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무역진흥공사가 최근 일본 동경의 「한국 우수상품 종합전시회」에서 일본 바이어와 소비자 4백46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그것을 가늠하는 한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조사에서 일본 바이어들은 우선 상품의 품질이 나쁘고(24.6%),거래기업이 가격인상을 빈번하게 요구하며(18.9%),클레임 제기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17.5%)고 불만을 나타냈다. 일반 소비자들의 품질에 대한 평가 역시 「보통」(39.7%),「미흡」(11.9%) 등으로 만족도가 낮았다. 이는 세계최고의 우수상품에 파묻혀 사는 일본고객의 「높은 눈」을 참작하더라도 충격적이다. 우리 기업들은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우수상품」이라고 내놓은 것이 품질부터 문제고,물건의 결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도 반응이 신통치 않으니 「우수상품 전시회」에 들어가지 못한 제품들은 불문가지일 것 아닌가.
○생산자논리 벗어나야
무역협회에 따르면 일본 수입상에서 한국상품 점유율은 88년 6.3%에서 91년에는 5.2%,올 상반기에는 4.9%로 내려갔다. 반면 중국상품의 점유율은 지난해 6%에서 올해는 6.7%,태국은 지난해 2.2%에서 올해 2.5%로 올라갔다고 한다. 일본과의 무역에 관한한 한국은 혼자만 손해보는 「풍년거지」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무공의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겠다.
물론 대일 무역에서 우리 기업이 처한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일본측은 관세인하에 소극적이고 품목별 창구지정,까다로운 검역,쿼타량 제한 등 비관세장벽도 턱없이 높여 놓고 있다. 그렇지만 마냥 저들을 탓할 수는 없다. 좋은 농사꾼에게는 나쁜 땅이 있을 수 없다. 일본 소비자의 구미에 딱 맞는 상품을 개발,친절한 서비스까지 곁들여 제공한다면 일본시장도 난공불락은 아닐 것이다.
한국기업들도 요즘들어 QC(품질관리)대신 QM(품질경영)을 모토로 삼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QM는 CS와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일본기업과 같은 실천력이다. 우리기업들도 「생산자의 논리」대신 「소비자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면 이번 무공조사에서처럼 한국상품이 혹평받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국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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