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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감사가 뭐기에 … 견제 안받는 '1.5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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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공무원도 해 보고 정치권에도 몸담아 봤지만 공기업 감사 시절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2년 전 공기업 감사를 지내고 다른 분야로 진출한 A씨의 고백이다.

그 시절 아침마다 집 앞에 중형 승용차가 대기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비서가 기다린다. 책상엔 서류철이 쌓여 있다. 공기업.공공기관에선 사장실에 올라가는 결재서류를 감사가 먼저 본다. 감사의 사인이 들어가야 사장실로 결재가 올라간다. 사내.외에서 들어오는 투서를 비롯한 각종 비리 정보는 감사에게 모인다. 하지만 감사를 견제하는 장치는 찾기 어렵다. 책임이나 업 무에 비해 연봉과 권한은 사장 못지 않다.

겉만 화려한 기관장보다 공기업 감사가 '숨겨진 꽃 보직'으로 불리는 이유다. 한 공기업 감사는 자신을 '조직의 2인자'로 꼽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는 스스로 '1.5인자'라고 했다. 든든한 정치적 배경으로 "마음만 먹으면 사장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공기업 감사의 업무 부담은 기관장보다 훨씬 적다. 3년(앞으로는 2년)의 임기도 보장된다. 사장 자리를 엿볼 기회도 적지 않다. 3월 한국전력 사장 공모 때는 현직 감사가 산업자원부 차관 출신과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현 정부 들어 유독 공기업 감사에 정치권.청와대 출신 인사가 몰리고 있다. 지난해 한나라당은 공공특위 토론회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과거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까지는 군인 출신이 감사 자리를 독점했고, 김영삼.김대중 정권 때는 정치자금으로 가신들을 관리했다. 현 정부는 공기업.공공기관의 감투로 정치적 보상을 하려는 경향이 짙다…." 여기에다 공기업 사장은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로 여론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감사는 그런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

정치권 실세가 공공기관 감사를 대거 꿰차면서 감사의 위상도 과거와 사뭇 다르다. 이들 중에는 대 정치권.정부 로비를 톡톡히 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번 '이과수 폭포 포럼' 출장 때도 일정이나 경비에 이의를 제기한 기관장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한 공기업 사장은 "실세 감사와 마찰을 빚는 건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임기 말이 되면서 감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번 남미 출장 참가자들은 현 정부에서 임명된 취임 1년 안팎의 감사가 대부분이다. 과천 경제부처의 고위 관계자는 "이번 사고도 '초짜' 감사들이 정권 말기에 해외 여행 혜택을 누리려고 지나치게 서두르는 바람에 터졌다"고 말했다. 현 정부의 정치인 출신 공공기관 감사 비중은 40%가 넘는다. YS 정부 때 24%, DJ 정부 때 32%보다 높다. 지난해 지방선거가 끝난 뒤 청와대에는 공기업 사장.감사 자리를 노리는 이력서가 쌓였다고 한다. 자리 보상을 요구하는 여당 낙선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제한된 감사 자리 경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공식적으로 감사가 하는 일은 두 가지다. 회사의 회계장부를 관리하는 일과 비리.부조리를 감시하는 업무다. 그러나 정치인 출신 감사는 이런 업무에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도 잘 모르는 마당에 꼭꼭 숨겨진 비리를 잡아내는 건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경영진이나 노조도 감사가 회사 일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걸 싫어한다.

이 때문에 정치인 출신 감사는 감사원의 감사를 방어하거나 대 국회 로비가 주업무일 때가 많다. 경영진이나 노조와 자연스럽게'짬짜미'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공기업 감사 중에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환경 때문에 이색 취미에 빠져드는 사람이 적지 않다. 등산.골프는 물론이고 새롭게 사교댄스나 악기 연주를 배우는 경우도 있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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