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방조도 범죄” 첫 판례/강기훈씨 유죄 확정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유서대필·자살명분 제공 모두 인정/전민련 등선 무효주장… 후유증 예상
강기훈피고인에 대한 유서대필사건이 대법원의 유죄인정 확정판결로 일단락됐다. 대법원은 이날 상고기각 판결로서는 이례적인 30여장에 달하는 장문의 판결을 통해 그동안 법리다툼을 빚어온 ▲유서대필·필적감정 ▲자살방조죄 구성 ▲일시·장소가 특정되지 않은 범행 등에 대한 법원의 입장을 밝혀 강 피고인의 구속후 4백43일만에 사법처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확정판결직후 「강기훈 공동대책위원회」 등 재야단체는 「상식과 양심을 외면한 유죄판결의 무효」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장외투쟁을 다짐하고 있어 당분간 후유증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필적감정=대법원은 유서의 내용과 체계,전민련이 변조해 제시한 수첩이나 업무일지 등의 정황 및 물증 등에 비추어 ▲분신현장에서 발견된 유서는 숨진 김씨의 필적이 아니며 ▲유서의 필적은 강 피고인의 필적이라는 필적감정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전민련이 김씨 필적이라고 제출한 자료가 변조된 흔적이 명백해 오히려 유서필적이 김씨의 필적이 아니라 강 피고인의 필적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판단한 원심을 인정하는 등 1,2심보다 확고한 입장을 보였다.
◇자살방조죄=변호인단은 『설사 유서가 대필됐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형사범죄는 구성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으며 대법원은 유서대필만으로 자살방조죄를 인정한 전례가 없어 재판연구관 등을 동원,상당한 법리검토를 거쳤다는 후문이다.
대법원은 『자살방조되는 자살도구를 만들어주는 등 물리적 방조는 물론 조언·격려 등 적극적·소극적·정신적 방조까지도 모두 포함한다』며 『자살하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한 것은 자살방조죄를 구성한다』는 판례를 남겼다.
◇범행특정=대법원은 『범죄의 일시·장소를 특정하지 않은 검찰의 기소는 잘못』이라는 변호인의 지적에 대해 『자살자와 유서대필자의 범행을 밝혀야 하는 수사특성상 「4월27일부터 5월8일 사이에 서울이하 불상지에서」만으로 된 검찰의 기소라 할지라도 ▲범죄의 동일성 인정 ▲이중기소방지 ▲시효저촉 여부 ▲토지관할 등의 판단에 문제점을 야기하지 않는』고 판결했다.
◇파장=사법적 판단에서 검찰이 일단 판정승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국과수의 문서감정 결과를 배척할 수 없는 법원·검찰의 입장처럼 도덕성과 순수성을 생명으로 하는 재야 역시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인정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이 사건은 앞으로 「장외무죄투쟁」과 소위 시국사범들의 「연대법정투쟁」 등으로 번져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권영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