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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사회」를 사는 지혜(정년을 이긴다: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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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취업희망 노인들 80%가 “돈·건강·외로움 이기려”/복지·연금제도 미흡… 홀로서기 어려워/해외인력 도입 대신 「숙련기능」활용을
『여러분,취업과 함께 지난날의 화려했던 나를 완전히 잊고 새출발해야 합니다. 젊은 직장선배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옷차림도 단정해야 합니다. 신문도 열심히 읽어야 젊은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달 19일 오후 2시,노인 취업을 무료로 알선하는 사회복지법인 「은초록」이 매주 금요일 마련하는 「노인취업특강」에 참석한 30여명의 노인들은 취업선배의 조언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듯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최근 노인취업을 알선하는 기관이나 단체에는 직장을 얻으려는 노인들이 줄을 잇고 있는데 「은초록」의 경우 지난 2년간(90.5∼92.5) 3만3천여명이 취업전화문의를 해왔으며 취업신청원서를 접수시킨 노인은 3천7백여명에 이른다.
또 한국노인문제연구소가 올 4월 전국의 1천5백72명의 60세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의식을 조사한 결과 50.1%가 취업을 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60대 72% 일 원해
특히 이들중 건강사정이 상대적으로 좋은 60대 초반의 경우 72.2%가 일자리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지난해 3월 삼양축산이 대관령목장에서 일할 「노인부부 목동」 9쌍을 모집하는데 무려 7백여쌍이 응모,약 80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신세계백화점이 역시 지난해 26명의 여성노인 판매원을 모집할 때도 약 10대 1의 경쟁률을 보여 화제가 됐었다.
제일제당이 지난해 뽑은 16명의 여성노인판매보조사원들은 6명이 학교교사 출신,2명이 학원강사출신이었으며 「은초록」에 취업을 의뢰한 3천7백여명중 27.5%가 전문학교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어 학력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취업열기가 매우 뜨거운 것을 알 수 있다.
노인취업특강에 참여한 노인들의 얘기.
『아이들 학비,결혼뒷바라지 하다보니 노후대책은 생각도 못했는데 정년으로 일터에서 밀려나니 앞이 캄캄합니다』『마누라와 아이들 눈치가 보여 무작정 집을 나서곤 하는데 정말 갈데가 없어요』『반찬도 갈수록 허술해지고 자식들도 대화에 끼워주지 않아요』『이대로 20년을 다 산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게 나아요.』
노인들의 취업욕구는 뜨겁고 취업의 필요성도 절박하다. 앞서 언급한 한국노인문제연구소의 의식조사에서 조사된 취업희망이유는 43.7%가 「생계유지」「용돈이 필요해」 등 돈때문이었으며 나머지는 「건강때문」이 29.4%,「일이 즐거워」가 19% 「외로워」가 7.8% 등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소 박재간소장(69)은 『선진국의 경우 10% 정도만이 정년후 일하길 원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연금제도 등 복지제도가 미흡해 발생하는 기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사회의 고령화·핵가족화·자식들의 부양의무회피 등으로 인해 더욱 노인들의 홀로서기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도탈락자도 많아
그러나 이들에 대한 일자리는 극히 한정돼 있는 실정.
노동부의 91년도 자료에 의하면 60세이상 취업자 1백28만여명중 이렇다할 보수가 없는 비임금근로자(가족고용 등)가 78.3%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은초록」의 신정차자들도 13%인 4백90여명 정도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그나마 한시적이고 파트타임이 대부분이며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힘들고 단순한 노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에게 허용된 직종은 부품조립 등의 공장일 42.7%,건물경비 20.5%,주유소주유작업 7.9% 등이며 나머지 대부분도 청소·주차장관리·아기나 살림돌보기 등에 대부분 국한돼 있다.
이들의 임금은 종일 고용시 월 35만∼45만원 수준.
78세의 나이로 서울 장안동 경남관광호텔 코피숍웨이터로 7개월째 일하고 있는 장인원씨의 경우 1남4녀의 자식들이 모두 부양을 기피해 노인정에서 숙식을 하다 취직했는데 『하루 15시간(격일근무)을 서있어야 하는 격무지만 돈과 건강·외로움 탈피 등 이제 취업으로 온 천하를 얻은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내 유수통신사의 언론인 경력 20년후 자기사업을 하다 그만두고 3년여의 무직생활에 건강과 자신감이 무너져내려 최근 무역센터에 대형서점인 서울문고에서 고객들의 가방보관업무를 하고 있는 최호정씨(61)는 『내 비록 월 40만원을 받는 책가방지기지만 4억원을 준들 건강을 되돌려받을 수 있겠느냐』며 새직업에 대한 기쁨을 토로했다.
이들 노인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
생명의 전화·노인능력은행·은초록 등 취업알선기관을 통해 일을 얻은 노인의 30∼70%가 중도에서 일을 포기하고 만다고 이 기관들은 밝히고 있다.
이들이 중도탈락하는 이유는 「작업환경이 나빠서」(43%),「근무시간이 길어서」(22%),「적성에 맞지 않아서」(19%),「능력부족으로」(12%),「급료가 적어」(2%) 순으로 나타나 절대다수가 열악한 근무조건을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양대 김재원교수(노동경제학)는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은 2010년께에는 정체현상을 나타내므로 기업들은 싫든 좋든 5명중 1명꼴인 노년인구를 활용하는 노력과 연습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면서 『흔히 기업인들이 값싼 해외인력 수입을 생각하지만 최근 조사결과 근로자들의 대부분이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내 이같은 방안도 인력수급의 근본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은초록」의 송금천대리는 『여성노인인력이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이는 식품판매업분야,그중에서도 백화점이나 식품회사 등에서는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젊은 인력이 빠져나가 할 수 없이 노인을 대체하는 일부기업에서는 노인은 고집이 세고 대접을 받으려해 젊은이들이 같이 일하기를 기피하고 있으며 결근이 잦은데다 사고의 위험부담도 크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생명의 전화」노인취업담당자인 이희숙씨(38)는 『노인인력을 적소에 배치시키고 알선해주는 정부차원의 취업전문알선기관 및 훈련기관이 필요하다』고 아쉬움을 밝혔다.
20년간 대우정밀에서 일하다 정년퇴직을 한후 최근 부산의 골프용품 생산업체인 고려레포츠재단실에서 일하고 있는 박한상씨(60)는 『우리사회 모두가 부양할 의무가 있는 노인인력을 팽개치고 외국에서 인력을 수입해 쓰는 업체가 많다니 한심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시간제고용 효과적
또 전직 중장비기술책임자로 일하다 56세에 퇴직해 부인과 함께 대관령목장에서 일하는 김승훈씨(57)는 『노년이 돼도 개인마다 건강상태 및 업무능력이 현저히 다를 수 있으므로 건강진단 등을 통해 정년을 차별적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들 전문가들이나 노인들은 대부분 직장인들의 정년연장이나 퇴직후 동일직장의 재고용등이 인사적체,고임금 등의 문제로 어렵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으나 노인인력을 적소에 배치해 시간제 고용으로 활용하면 많은 부분인력과 임금낭비를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법무사 사무실 사무장생활 20여년을 하다 퇴직,최근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에서 공부하며 법무사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성환씨(54)는 『시험에 합격하지 않을 경우 법률지식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할 수도 있지 않느냐』면서 생계의 방편으로 꼭 돈을 벌어야 하는 경우가 아닌 노인들의 경우 경로당에서 무료하고 외롭게 소일하지 말고 사회에 봉사하는 길을 찾는다면 이 역시 고독과 소외감,건강악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특별취재반
특집부
방인철 차장
고혜련 기자
배유현 〃
김창화 〃
이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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