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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전후 체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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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후(戰後)'란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을 경계로 하는 시대구분이야 만국 공통이겠지만, 일본에서는 정치 체제와 사회 규범.가치관 등의 근본적 변화가 '전후'란 두 글자에 함축돼 있다. 전전(戰前)의 황국신민이 보통선거권을 갖는 자유민주국가의 시민으로 거듭났으니 환골탈태란 표현이 딱이다.

많은 일본인에게 전후는 성공의 동의어다. 도쿄 대공습으로 불바다가 되고 원자폭탄을 맞아 잿더미가 된 나라를 단기간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성공 시대'다. 그 열쇠는 말할 것도 없이 전후 일본이 걸어온 '경(輕)무장 경제우선'의 노선이었다. 군국주의라는 잘못된 국책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던 전전과 결별한 일본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일념으로 개미같이 부지런하게 일하고 또 일했다.

대신 과거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일이나 또다시 전쟁에 말려 들어갈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레르기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보였다. 대체로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은 2차 대전 당시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전전세대 또는 전쟁 중에 태어나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전중(戰中)세대에 많다. 전전과 전후의 비교 체험을 통해 평화와 번영을 지선의 가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전후 노선'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 제일 또는 경제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총체적 국력과 국가위상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는 말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힘을 길러야 실현된다는 인식도 있다. 이는 군대 보유를 금지한 현행 평화헌법 개정론으로 이어진다. 보수적이거나 내셔널리즘이 강할수록, 세대가 내려갈수록 이런 생각이 강하다. 전후 세대로는 첫 총리가 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지난해 취임 당시부터 '전후 체제의 탈피'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하지만 전후를 성공의 상징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같은 인식에 아직도 의문을 품는다.

아베 총리가 전후 탈피를 위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고 있다. 헌법 개정 첫 단계인 국민투표법 개정안이 오늘 참의원에서 통과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3년 뒤부터 헌법 개정안 발의가 가능해진다. 아베는 또 7월 참의원 선거에서 헌법 개정 여부를 선거 쟁점화할 생각이다. 모험을 동반하는 과감한 정면 돌파 전략이지만 향방은 점치기 어렵다. 아베 총리의 모험은 전후에 대한 일본인 스스로의 평가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