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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낙인’ 2500만 달러 결국 정치적 타결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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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08면

마카오 시내 BDA. 미국이 북한동결자금 인출을 중개할 미국은행을 찾아내면서 20개월간 북핵 진전의 발목을 잡아온 BDA 문제 해결이 눈앞에 다가왔다.

2005년 8월 21일. 미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동부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리는 이 항구에 정박 중인 유람선 ‘로열 참(Royal Charm)’에서 결혼식이 예정돼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미국 마피아의 일원으로 위장한 연방수사국(FBI) 비밀 요원. 4년 전부터 마카오를 거점으로 위조달러ㆍ마약ㆍ담배를 유통시켜온 아시아계 범죄 조직의 미국 파트너로 행세했다. FBI의 함정 수사였다. 작전명은 이 유람선의 이름을 딴 ‘로열 참’. 유람선엔 턱시도 차림의 범죄 조직원 수십 명이 도착했다. 완벽한 작전이었다. 일망타진이었다. 거의 같은 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스모킹 드래건(Smoking Dragon)’이란 소탕 작전이 벌어졌다. 이날 미 당국에 붙잡힌 아시아계 범죄 조직원은 59명이었다(미 법무부 웹사이트). 두 작전은 미 범죄 수사에 남을 쾌거였다고 한다.

해결 초읽기 들어간 BDA문제…20개월 北·美 시소게임

이 수사는 법적 제재로 확대된다. 표적은 BDA. 마약ㆍ무기 거래의 불법 자금 세탁과 위조지폐 유통의 중심고리로 확인됐다. 유통의 진원지는 북한. 마카오, 그중에서도 BDA는 1970년대 이래 북한의 국제 금융거래 창(窓)이었다. 노동당 비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의 직계 기업인 조광무역의 주거래 은행이다. 마카오를 주무대로 한 북한의 불법자금 규모는 전체 수출액(2005년 현재 10억 달러)의 35~40%를 차지한다고 데이비드 애셔 전 국무부 고문(불법활동 담당)은 주장한다. 미국은 십수 년 동안 지켜봐 왔던 BDA-북한 커넥션을 수사를 통해 적발한 셈이다. 미 사법당국의 수사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돈세탁 대상은 중국은행(BOCㆍ상업은행) 마카오 지점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BOC를 정면으로 문제삼지 않았다. 마카오 경제에 대한 충격과 중국과의 관계를 저울질했다고 한다(뉴욕타임스).

9월 15일 워싱턴. 미 재무부는 BDA를 돈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했다. 스튜어트 레비 재무부 차관(테러ㆍ금융범죄담당)은 “BDA가 북한의 불법 금융활동 앞잡이(willing pawn)”라고 말했다. 적용 법률은 9ㆍ11 테러 직후 제정된 애국법 311조. 은행비밀법상의 돈세탁 규정을 강화한 조항이다. 미국 금융기관과 BDA의 거래를 사실상 중지시키는 조치였다. 이를 계기로 거대 관료기구 재무부가 전면에 나섰다. 북한의 대미(對美) 전선은 확대됐다. 다음날 BDA에서 자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다. 4000만 달러 이상이 빠져나갔다. 마카오 금융당국은 BDA 조사 전담팀을 구성했고 이틀 후 경영권을 인수해 북한 관련 계좌 52개 2500만 달러를 동결했다(월스트리트저널).

9월 13~19일 베이징.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열렸다. 북한은 미국의 BDA 제재의 후폭풍을 감지하지 못했다. 북핵 폐기와 관계국 간 정상화 등 원칙을 담은 9ㆍ19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자회담이 시작된 지 2년 만에 나온 첫 합의문이었다. 미국의 당시 대북정책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외교다. 6자회담을 통한 북핵 해결이다. 다른 하나는 방어적 접근(defensive approach)이다. 필립 젤리코 당시 국무부 고문은 “국제 금융시스템 보호는 북한에 밀수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의 하나”라고 말했다(워싱턴포스트 기고). 미국은 이후 대북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10월 21일 조선광성무역 등 북한의 8개 기업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다. 북한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11월 9~11일 베이징 5차 6자회담 1단계 회의. 최대 의제는 BDA 문제였다. 김계관 북측 수석대표(외무성 부상)는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를 걸고 넘어졌다. BDA 문제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산물로 9ㆍ19 공동성명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금융은 피와 같은 것이다. 금융이 멎으면 심장이 멎는다”고 비유했다고 한다.(『김정일 최후의 도박』, 후나바시) 김계관은 마지막 날 기자회견을 열어 다시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법 집행의 문제라고 했다. 미국은 북한의 위폐ㆍ인권 문제 등에 대해 전방위 공세에 나섰다. 북ㆍ미 관계는 다시 최악의 국면을 맞았고, 한ㆍ미 관계도 삐걱거렸다.

2006년 3월 7일 뉴욕. 북ㆍ미 금융문제 실무접촉이 열렸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북한은 7월 5일 장ㆍ중ㆍ단거리 미사일 7기 발사로 맞섰고, 급기야 10월 핵 실험을 단행했다. 북한은 미국의 금융제재가 김정일 체제 전복을 노린 위장 전술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이 바뀌었다. 북한의 핵 실험과 11월 미 의회 중간선거에서의 공화당 패배가 계기였다.

2007년 1월 16~18일. 베를린에서 북ㆍ미 양자 회담이 열렸다.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의 상징이자 사태 반전의 계기였다. 북한의 비핵화 초기 조치를 담은 6자회담 2ㆍ13 합의의 밑그림을 그렸다. 당시 북ㆍ미는 6자회담 합의 30일 안에 BDA문제를 해결키로 했다. 이 과정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헨리 폴슨 재무장관을 설득했다고 한다. 3월 14일 미국은 BDA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수기(手記)로 된 30만 건의 BDA 문건을 1년반 동안 검토했다고 한다. 닷새 후 미국은 북한 자금 이체의 해법을 밝혔다. 북한이 중국은행에 개설된 조선무역은행 계좌로의 이체를 제안했고, 이 처리는 마카오 당국이 처리할 것이란 내용이다.

그러나 50일이 지나도록 문제는 매듭되지 않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문제의 요체는 어느 나라 은행도 미 재무부가 ‘방사능에 오염됐다’고 낙인 찍은 북한 돈을 취급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국제 금융가에서 ‘2500만 달러’는 국제사회에서의 북한보다 더 고립됐다. 이 당국자는 “북한은 BDA 문제를 통해 금융 세계에 눈을 뜨면서 신용이 없으면 고도(孤島)에 살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평양 직접 송금이나 현금 인출을 거부한 것은 이와 맞물려 있을 수 있다. BDA 자금 송금을 국제 금융체제 복귀의 시금석으로 삼겠다는 태도로 나왔다. 이 와중에 중국의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은 우리 측에 “개성공단에 개설된 우리은행 지점을 이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중국은행이 거부한 것을 한국의 민간은행이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정부는 이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국책은행인 한국수출입은행을 북한 돈 중개은행으로 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결국 이 문제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 재무부가 북한 자금을 중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니컬러스 번스 국무부 차관은 9일 “BDA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한 재무부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 타결을 꾀한다는 얘기다. 그토록 공을 들여 적발한 ‘악의 축’ 북한의 불법자금에 미국 스스로 면죄부를 씌워주는 것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자서전은 쓰지 않겠지만 이것에 대해 손자들에게 얘기해줄 것이다.” 힐 차관보는 4일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놓고 얘기하지 못할 사연이 정말로 많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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