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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패션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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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30면

신라호텔 레스토랑에서 사용하고 있는 ‘박영숙 요’의 그릇. 대영박물관에 소장될 만큼 작품으로도 인정받는 그릇이다.

미각ㆍ촉각ㆍ후각ㆍ시각ㆍ청각, 이 오감 모두를 충족하는 음식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중 시각은 다른 감각보다 가장 먼저 우리의 반응을 이끌어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그릇이라는 단단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최초의 사건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청담동의 터줏대감이었던 ‘시즌스’에서 문을 연 한식집 ‘쁘띠시즌스’라는 곳에서 식사를 하던 때였다. 그릇과 반찬이 서로 색과 소재까지 완벽하게 궁합이 맞아떨어져서 나오는 음식을 본 순간, 한참 동안 수저를 대지 못하고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영화 ‘스캔들’의 현대판 이미숙이 된 듯했다. 인간문화재 이봉주씨를 비롯해 이천수ㆍ장진ㆍ이헌정 작가의 작품에 김영희 사장만의 센스로 담아 내오는 맛깔스러운 음식은 세계 어느 나라의 음식과 식기보다 아름다웠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호기심이 가는 테이블 웨어를 볼 때면 창피함을 무릅쓰고 누구의 이니셜이 있는지, 혹은 어떤 브랜드인지 살펴보는 고약한 버릇이 생긴 건.

음식보다 그릇을 먼저 맛보라

에르메스의 화려한 그릇들.

‘팔레 드 고몽’ 역시 요리 하나와 그릇 하나하나를 절묘하게 매치하는 대표적인 프렌치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다. 생선요리는 섬세한 물고기 무늬가 그려진 ‘빌레로이 앤 보흐’의 플레이트에, 쇼적인 면이 강한 디저트는 컬러감 있는 그릇에 우아하고도 화려하게 담겨 등장한다. 물론 계절과 요리 방식의 변화에 따라 매번 플레이트의 선택은 달라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동스러운 점은 손님과 모임의 스타일에 따라 테이블 웨어에 변화를 준다는 데 있다. 중동 대사가 손님이라면 금장의 화려한 무늬가 있는 접시를 내놓고, 부모님과의 식사라면 좀 더 점잖고 품위 있는 디자인을 선택한다.
우리나라 그릇이 어느 나라의 요리와도 어울린다는 깨달음을 준 레스토랑은 바로 이탈리안 레스토랑 ‘일 치프리아니’. ‘일 치프리아니’의 성공에는 그릇이라는 아트 워크가 큰 바탕이 되었다. ‘우리그릇 려’의 다소 무거우면서도 투박해 질펀한 손맛이 느껴지는 그릇과 고운 흙을 사용한 심플한 디자인의 그릇이 믹스되어 사용된다. 시즌마다 그릇의 형태나 장식 방법은 바뀌지만, 정형화되지 않은 모양에 흙내음이 풍기는 긴 플레이트에는 갓 구워낸 빵과 마늘이 올려져 나오고 묵직한 옥빛의 볼에 먹음직스러운 시푸드 파스타가 준비되는 식이다.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각 레스토랑에 한껏 힘을 준 신라호텔의 경우는 국내 최고의 호텔다운 그릇을 사용한다. 중식당 ‘팔선’과 일식당 ‘아리아케’에서 식사를 한다면 음식을 먹기 전 그릇부터 감상하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대영박물관에도 들어가 있는 ‘박영숙 요’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백자로 중식 요리의 미적 요소를 극대화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일식당 ‘아리아케’는 심지어 음식과 그릇의 코디를 맞춰주는 전문가까지 배치되었다. 조리장이 만들어내는 요리는 최종적으로 코디네이터의 손끝을 거쳐야만 완성된다. 신라호텔에서 운영을 맡고 있는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지하에 자리한 ‘마당’에는 모든 테이블 웨어가 에르메스 제품이다. 심플한 에르메스의 커트러리로 스테이크를 맛보는 즐거움, 같은 가격이라도 장인의 손을 거친 에르메스 잔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무언가 달라도 다르다. 실제로 ‘에르메스’의 테이블 웨어를 즐기고자 ‘마당’을 찾는 손님도 꽤 있다고 한다.

생활에 가장 가깝고 싼 예술, 그릇

새로 생기는 레스토랑의 경우, 유명 작가의 그릇보다는 개성 있는 컬러로 승부를 걸기도 한다. 지난해 가을 압구정동에 문을 연 ‘젠 하워드 어웨이’라는 아시아 다이닝 바는 모든 테이블 웨어를 태국과 발리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

바로 지난달 문을 연 유러피안 브라세리 ‘액추얼리’ 또한 모든 그릇을 태국에서 들여왔다. 컨설팅을 책임졌던 ‘비 마이 게스트’의 김아린 대표는 “그릇은 가장 기본이 되는 레스토랑 홍보전략 중 하나다. ‘액추얼리’가 트렌드를 앞서 간다는 느낌을 그릇 하나에까지 두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우리그릇 려’의 박은숙 대표는 “그릇은 직접 생활 속에서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가깝게, 또 저렴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추천한다. 생소한 느낌의 그릇을 집에서 소화하기 두렵다면, 먼저 개성 있는 그릇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을 찾아가자. 음식이 담겨 있을 때 어떤 느낌인지 눈여겨보고 직접 사용해보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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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씨는 사람과 사회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감각의 촉수를 뻗어두고 있는 패션·라이프 스타일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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