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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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29면

능력 있는 양조자나 질 좋은 테루아르를 지닌 샤토가 좋은 와인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와인 시음기-‘샤토 르팽’

역시나 출발부터 심상치 않은 ‘르팽’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고 와인(Garage wine)’의 시발점이 된 ‘르팽’은 매우 작은 지역에서 매우 적은 수확량으로 제조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와인 중 하나다. ‘르팽’은 5에이커의 매우 작은 포도밭에서 생산된다. 차고라는 이름은 바로 양조장이 차고만큼이나 작기 때문에 붙여졌다.
1979년 첫 빈티지를 내놨으니 아직 30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세월이지만 ‘르팽’은 벌써 보르도 와인의 최고봉에 서 있다. 1년에 5000병만 내놓는 적은 생산량이므로 모든 와인 애호가의 동경의 대상이 된다. ‘르팽’은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와인인 것이다.

적은 생산량과 뛰어난 질,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수요. 이렇게 3박자가 맞아떨어지니 당연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게 마련이다. 수많은 와인을 여러 번 시음해본 필자지만 ‘르 팽’은 아직 스무 번이 채 넘질 않는다. 워낙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와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1년에 24병 독점 수입된다. ‘르 팽’은 단 10년 만에 부와 명성을 따라잡은 뛰어난 와인이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와인 평론가들은 ‘르팽’을 ‘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와인’이라고 부른다.

필자가 가장 최근에 테이스팅한 ‘르팽’은 1995년 산이다. 다크 가넷 컬러를 보인다. 컬러만 봐서는 숙성이 제법 된 듯하나 림을 봐서는 아직 숙성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 시간의 디캔터 브리딩 이후 시음에 들어간다.

잔을 코로 가져가자마자 장미와 허브 등 화려한 꽃 향기가 꼭 부르고뉴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미네랄 터치와 포므롤 특유의 흙 내음이 올라오며 뒤를 이어 오크 바닐라 트러플 에스프레소 터치까지 살려낸다. 매우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어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이 더 강해지고 화려해지나 처음 한 시간 정도만 디캔터 브리딩 뒤 부르고뉴 와인처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타닌은 순간 임팩트가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오래 지속된다. 뒤를 이어 깔끔하게 느껴지는 애시디티가 침샘을 자극하며 잔잔하면서도 은은하게 길게 가져가는 피니시가 압권이다.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초콜릿 같은 느낌이랄까.

추천 빈티지는 1982ㆍ83ㆍ85ㆍ86ㆍ88ㆍ89ㆍ90ㆍ94ㆍ95ㆍ98ㆍ99ㆍ2000ㆍ2001ㆍ2002ㆍ2004년 산이다. 이 가운데 가격 대비 가장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하는 와인은 2001 빈티지다. 같이 식탁에 올리면 좋을 음식은 송아지 요리와 육회 안심 스테이크. 좋은 궁합을 이룬다.

필자가 마신 지 한 달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아름다운 향기가 코끝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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