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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살결에서 나를 발견한다 이성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호 10면

영화 ‘살결’.

사진작가인 민우는 10년 만에 옛 애인을 만난다. 그녀는 민우에게 아홉 번의 섹스를 제안한다. 이별이 예정된 섹스가 이어지는 동안, 새 자취방으로 이사를 간 민우는 낯선 소녀의 환상을 보게 된다. 그 방에 살고 있었던, 어디론가 사라진 소녀. 민우는 현실과 비현실의 틈 어딘가에서 헤매게 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저예산 디지털 영화 ‘살결’의 스토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우와 옛 연인의 섹스는 아주 리얼하지만 기묘한 느낌을 주고, 민우가 보는 소녀는 환각이지만 살결의 감촉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살결’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평범한 사람들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고, 섹스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영화다. 민우와 옛 연인의 첫 번째 섹스는 7분여 동안, 아주 자세하게 그려진다. 에로영화보다는 정갈하게, 예술영화보다는 리얼하게. ‘살결’의 이성강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소통하는 가장 친밀한 방식이며 일상 그 자체’인 섹스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섹스를 통해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여전히 섹스가 은폐된 일상인 한국사회에서 ‘살결’은 꽤 도발적인 영화다.

실사와 애니메이션 오가는 첫 한국 감독

이 정도로만 본다면 ‘살결’은 꽤 야심적인 신인 감독이 만든 인디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실사영화 연출은 처음이지만, 이성강 감독은 이미 두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와 ‘천년여우 여우비’를 연출한 이력이 있다. 일본에서는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나 ‘아키라’의 오오토모 가쓰히로, 미국에서는 ‘비포 선라이즈’와 ‘스캐너 다클리’의 리처드 링클레이터처럼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넘나드는 감독들이 가끔 등장하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시도했던 감독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성과물을 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성강 감독이 전인미답의 길로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다가 돌연 어른들의 지극히 사적인 일상을 그린 실사영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듣고 싶어서 이성강 감독을 만났다. 역시나 그의 이력은 유별나다.

연세대 심리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때부터 미술을 시작했고, 민중미술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멀티미디어 작업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애니메이션까지 만들게 됐다. 그리고 실사영화에도 도전했다. 단편영화를 만든 적도 없고 연출을 배운 적도 없었는데, 실사영화를 연출하는 데 두려움은 없었을까?
새로운 시도 같은 것은 그에게 일상 같은 일이다. 미술을 하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장편에 뛰어드는 과정 모두가 ‘모험’이었다. 그에게 컴퓨터는 대단히 중요하고 재미있는 도구였다. 컴퓨터는 재료나 기법의 제한이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 멀티미디어 작업에 빠져들면서 움직임에 매료된 이성강 감독은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갔다.

타자를 통해 발견하는 자기 정체성

이성강 감독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은 꽤 주목을 받았다. 영화제나 애니메이션 상영회 등을 통해 공개되었지만 그에게는 갈증이 있었다. 한꺼번에 상영되는 여러 애니메이션 중에서 하나로만 취급되는 게 언짢았던 것이다.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 단편 애니메이션‘들’의 하나인 것이. 장편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는 그런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 욕망을 하찮다거나 속물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중요한 동기다. 소리 높여 하고 싶은 말이 없다면, 과시하고 싶은 치기가 전혀 없다면 창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성강의 작품에는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가 엄연히 존재한다. ‘마리 이야기’와 ‘살결’을 이어서 보면 흥미로운 요소들이 발견된다. “386세대는 청년기의 추억을 만들지 못한 세대다. ‘마리 이야기’에서는 그래서 어린 시절의 환상을 통해 마리를 보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살결’은 ‘마리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무기력하고, 현실에 개입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던 민우는 귀신을 만나고, 그것을 통해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난다.”

정체성은, 결국 타자를 통해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살결’은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가장 친밀한 섹스를 하는 남녀의 이야기인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과 어른들을 위한 실사영화는 그렇게 친밀한 관계였던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사실은 아주 가까운, 혹은 거울의 양면 같은 관계인 것처럼. 그가 특이한 감독인 이유는, 이력 때문이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지우듯이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경계 역시 희미하게 만드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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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씨는 영화ㆍ만화ㆍ애니메이션ㆍ게임ㆍ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LIFE STORY

이성강 감독은 연세대 심리학과에 들어간 뒤에야 미술을 시작했다. 시작은 늦었지만, 그의 예술적 표현방식은 다채로웠다. 민중미술에 흠뻑 빠져 있다가 자신을 표현할 매체를 찾겠다며 멀티미디어 작업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단편ㆍ장편 애니메이션들은 상도 많이 받았다. ‘마리 이야기’로 2002년 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을 받고, ‘오늘이’로는 자그레브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특별상을 받았다. 그리고 2005년 밴쿠버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던 그가 찍은 실사 영화 ‘살결’이 최근 개봉됐다.

FILMOGRAPHY

마리 이야기(2001년)
목소리 출연
이병헌( 남우)ㆍ공형진( 준호)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할머니와 사는 바닷가 소년 남우. 어느 날 구슬 속 미지의 소녀 마리를 만나게 된다. 남우의 말을 믿지 않던 친구 준호도 환상의 소녀 마리를 만나며 둘은 아름다운 비밀을 품게 된다. 2002년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 수상.

오늘이(2003년)
목소리 출연
김희선(매일이)ㆍ김서영(오늘이 )
시위 주동 혐의로 수배됐다 탄광촌에 숨어든 대학생 기영. 그곳에는 무기력한 연탄공장 노동자들, 티켓을 파는 다방 아가씨, 그리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망나니 같은 연탄공장 사장의 외아들이 있다. 검은 먼지만 휘날리는 탄광촌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으로 읽힌다.

별별 이야기(2005년)
감독
유진희ㆍ이성강ㆍ박재동 등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ㆍ제작한 옴니버스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인권(차별)을 주제로 애니메이션 감독 여섯 명이 참여해 만들었다. 그중 이성강 감독은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아픔을 다룬 ‘자전거 여행’으로 참가했다. 장애인 현실을 다룬 ‘낮잠’(유진희 감독) 등도 함께 수록돼 있다.

천년여우 여우비(2006년)
목소리 출연
손예진(여우비)ㆍ공형진(강선생 )
이성강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장편 애니메이션. 꼬리 다섯 달린 여우 소녀 여우비가 인간의 아이들과 나누는 우정과 환상의 모험을 그렸다. 100년을 넘게 살았지만 여우로 치면 막 사춘기를 맞는 여우비는 산속에서 또래 인간 아이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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