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늑장 수사 김 회장은 모르쇠 아쉬움 남긴 15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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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있던 11일 밤. 김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 남대문경찰서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경찰은 기자를 붙잡고 "영장이 발부될까요"라고 물어봤다. 수능 성적표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초조한 모습이었다.

이날 남대문서 강대원 수사과장과 이진영 강력2팀장 등 수사팀 20여 명은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아침 일찍 법원으로 향했다. 남대문서 2층 소회의실의 수사본부는 모처럼 한가했다. 남대문서 4개 팀(24명)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20명 등 44명으로 구성된 수사팀은 이 수사본부를 중심으로 늘 바쁘게 움직여 왔다.

경찰서 전체의 온 신경은 법원에 쏠렸다. 수사팀 관계자는 "법원의 결정이 통보되길 기다리느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무과 직원들은 김 회장의 구속에 대비해 오전 10시쯤부터 남대문서 정문 앞에 포토라인을 쳐놓았다. 카메라 기자 30여 명도 일찍부터 김 회장이 구속 수감되는 모습을 담기 위해 대기했다. 경찰서 3층 대강당에 마련된 임시 기자실에도 40여 명의 취재기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오후 5시쯤 되자 "김 회장이 혐의를 시인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건 수사에 매달려온 경찰들은 약간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강력 2팀 소속 형사는 "보름 동안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갔다"며 "처음부터 시인했더라면 부정(父情)에 대한 동정 여론이라도 얻어 상황이 달라졌을텐데…"라고 말했다.

수사팀은 초기에 미숙한 대응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았었다. 지난달 27일 김 회장 차남(21.미 예일대 재학 중)의 출국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것이 혼선의 시작이었다. 김 회장과 아들을 소환하고도 대질신문을 거부당하자 쩔쩔매기도 했다. 압수수색 전 미리 친절하게 시간을 알려줘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현장의 수사관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하소연했다. 한 수사관은 "나는 0.02%라도 수사에 소홀한 부분은 없었다. 경찰의 자존심을 걸고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신수사 등을 통해 물증을 잡아낸 것도 그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러나 어설픈 초기 대응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경찰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김 회장의 태도였다. 김 회장이 경찰에 출두하면서 "경찰 조사에서 다 밝히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대기업 총수답게 진실을 밝힐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줄곧 '모르쇠'전략으로 일관했다. 한화 측은 휴대전화 통화기록이 나오고 조직폭력배 동원 의혹이 제기되자 말을 바꿨다. 한화 부속실장은 8일 해명자료를 내고 "청계산에 갔지만 회장님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호과장도 9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내가 다했다"고 말했다. '회장님 구하기'전략으로 비쳤다.

김 회장은 이날 영장실질심사 직후 기자들에게 "제가 수양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라며 뒤늦게 말했다. 우선 보복 폭행에 동원된 의혹을 받고 있는 조폭의 실체를 찾아야 한다. 김 회장은 이날 밤 기자들의 질문 세례 속에 남대문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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