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 나타난 '합의이혼 숙려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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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가부장적이었던 남편(41)은 2000년 주식 투자로 4억원짜리 아파트를 날렸다. 그대로 뒀으면 10억원이 넘었을 재산을 날린 부부는 틈만 나면 싸웠다. 전셋집으로 옮긴 이후에도 남편은 아내(39) 모르게 주식에 손을 댔다. 지난해 이를 발견한 아내는 '사생결단'을 하고 싸웠다. 대화는 없었다.

부부는 결국 "더 이상의 싸움은 아이들 교육에도 좋지 않다"며 이혼을 결심하고 법원을 찾았다.

하지만 법원은 "3주 뒤에 이혼 의사를 확인하겠다"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법원이 제공하는 상담을 받으면 일주일 뒤에 이혼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하루빨리 이혼을 하려 했던 부부는 상담을 받았다. 상담 과정에서 아내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집을 되찾아 주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들었다. 이혼 뒤 자녀 교육과 생계 등도 막막하다는 사실도 되새기게 됐다.

결국 이 부부는 협의이혼 신청을 취하했다. 법원이 협의이혼을 하려는 부부에게 마지막 3주일을 심사숙고하게 하는 협의이혼 전 숙려(熟慮) 기간 제도가 효과를 보고 있다. 지난해 협의이혼을 신청한 부부 10쌍 중 두 쌍이 이혼 신청을 거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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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려 기간 뒤엔 "미워도 다시 한 번"=지난해 서울가정법원에 협의이혼을 신청한 부부는 7107쌍. 이 중 19.1%인 1355쌍이 협의이혼을 취하했다. 2005년 2월 이전의 취하율인 7~8%보다 두 배가 넘는다. 2005년 2월 이전에는 오전에 가정법원에 협의이혼을 신청하면 오후 3시에 이혼확인등본에 법원의 도장이 찍혔다. 이것을 주소지 구청 등에 내기만 하면 부부는 남남이 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2005년 3월부터 협의이혼 방식을 바꿨다. 법원이 이혼 의사를 확인해 주는 시점을 일주일 뒤로 미룬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급한 이혼을 막아 이혼으로 파생되는 자녀 양육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라고 설명했다. 2005년 3월부터 1년간 협의이혼을 취하하는 비율은 16%대로 높아졌다. 이에 대법원은 지난해 3월부터 숙려 기간을 3주로 늘렸다.

인터넷 이혼클리닉을 운영하는 이상석 변호사는 "이혼하려는 부부에게 시간을 갖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부싸움이 격해지면 자존심 싸움이 되고 되돌리고 싶어도 기회를 찾지 못한 채 파국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숙려 기간이나 상담 제도 등은 자존심을 접는 명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인 고창섭(예손의 집 가정상담소장) 목사도 "대부분의 부부는 대화가 부족하고 격한 행동이 이어지는 바람에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며 "이혼을 막고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많은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승현.박성우 기자

◆ 이혼숙려제도=협의이혼을 신청할 경우 성급한 이혼을 막기 위해 부부가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하는 제도. 2004년 12월 서울가정법원 가사소년제도개혁위원회에서 상담제도와 함께 도입하기로 의결한 뒤 2005년 3월 2일부터 시범적으로 실시됐다. 현재 서울가정법원에서는 숙려 기간을 가정폭력 등 급박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3주로 정해 시범 시행 중이다. 지난해 10월 국무회의를 거친 법률개정안이 마련돼 국회 의결을 통과하면 모든 법원에서 정식으로 시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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