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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을 갉아먹는 허세병/이종대(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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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허세가 내실을 뒤덮는 세월이 오래가면 개인·기업·국가는 종당에는 망하고 만다. 겉모양의 크기에서 내실의 크기를 공제한 잔여분을 허세로 규정할 경우,이 허세의 비율은 곧 한 개인이나 조직의 건강상태,또는 병적증세의 정도를 나타낸다.
○외형중심생활 고질화
고대 로마에서 구소련에 이르기까지 강대국의 멸망기에는 예외없이 국가적 내실로 뒷받침되지 않는 허장성세의 사회현상이 독버섯처럼 번졌다. 소련해체를 보면,부실해진 국력으로 도저히 떠받치기 어려울만큼 비대해진 당과 군의 중압에 눌려 국력의 기반자체가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그 중압은 바로 초강대국의 허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허세의 크기와 그 해악은 어느 정도일까. 허세의 함량을 가늠케 해주는 실례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정치권에서,특히 선거철에 쏟아져 나오는 과대공약의 허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선전의 많은 부분이 과대포장돼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정부활동부문에서도 허세의 흔적은 한둘이 아니다. 정부 각 부처가 현실적인 재원조달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간헐적으로 발표하는 대형 사업계획은 허세의 전형에 해당된다. 최근 서울시내도로 곳곳을 파헤쳐 차도의 가장자리를 화강석으로 갈아끼우느라 수십억원의 예산을 쓰고 있는 것도 긴축의 정책기조에 걸맞지 않는 겉치레로 지적할만 하다.
기업경영과 국민들의 일상생활속에도 허세는 깊게 자리잡고 있다. 기업의 기술개발과 품질향상의 속도가 굼뜨고 순이익이 감소하는 추세속에서 유독 매출액만 급신장을 거듭해온 사실은 경영의 주된 목표가 내실보다 외형에 있음을 말해준다.
큰 집과 큰 차와 고급의상을 별나게 선호하고 집치장·차장식·몸단장에 열을 올리는 생활풍속,사계절을 가리지 않는 행락인파,1회용품의 범람,물쓰듯 하는 전력소비,쓰레기속의 멀쩡한 옷가지들,2만∼3만원짜리의 호텔식사,두툼해진 경조금 봉투 등 일상화된 허세의 사례들은 일일이 다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사회분위기가 큰 문제
허세의 문화가 이토록 폭넓게 정착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허세를 조장하는 사회적 동기가 강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초라한 실체의 노출보다는 분식과 과장이 더 많은 이득을 불러온다는 계산이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웬만한 공공기관,심지어 일부 민간기업에서조차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내방객의 옷차림이나 타고 온 차의 크기를 먼저 살핀다. 이것은 외형을 기준으로 한 심사관행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산업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부가가치나 순이익에 관계없이 매출액과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사업의 성공에 가장 유리하다는 사고가 팽배했고 실제로 외형팽창은 소비자의 반응,은행과의 거래,관청과의 관계면에서도 여러가지 이득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었다.
거죽만 보는 사회적 평가의 관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요소는 일찍부터 경제정책에도 주저없이 도입됐다. 예컨대 수출에 대한 무역금융지원은 국내에서의 부가가치에 관계없이 수출액 그 자체를 기준으로 삼는다. 투자자문회사는 일정수의 박사학위소지자를 채용해야 한다는 희한한 제도도 생겨났다.
이처럼 고질화되다시피한 외형중심의 사회적 평가제도하에서 개인과 집단이 나타낼 반응은 뻔하다. 내실이 빈약할수록 더 많은 장식물을 첨가해 바깥 모양을 크고 좋게 보이도록 애쓸 것이다. 공공·민간부문을 가릴 것 없이 각종 행사에 모양갖추기가 성행하고 국회의 회의·매스컴·토론회·공청회·세미나에서 알맹이있는 얘기는 짧게,변죽과 서론은 장황하게 개진되는 풍경을 한쪽에 두고,또 그것을 조장하는 사회적 평가관행을 방치해둔 채로는 내실있는 국가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잘못된 관행 치유 시급
민주주의의 허울이 실질을 앞서고,경제의 체질이 웃자란 덩치에 못미치며,사회가 곧잘 들뜬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허세문화를 청산하지 못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로 파악해야 옳을 것이다. 허세를 부리는데 들어가는 비용과,또 그것이 내실을 갉아먹는 파괴력까지 생각하면 허세병의 치유는 하루가 급한 실정이다.<기아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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