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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탐구 위기관리 능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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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물러서지 않고 대담하게 정면돌파 YS/일단 후퇴한뒤 침착하게 반전 모색 DJ/독창적인 순발력과 뚝심으로 타개 CY/결단력 뛰어나지만 준비성 모자라 김영삼후보/치밀한 계획 돋보이나 조심 지나쳐 김대중후보/적응력 탁월… 감정적·즉흥적 경향 정주영후보
차기대통령에게는 물가고·수출부진 등 경제난과 남북한관계의 급진전에 따른 통일문제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국가경영과 위기관리능력이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현재 여야의 대통령후보로 나선 3자는 정치(두김씨)와 경제분야(정주영씨)에서는 각기 역경을 헤쳐나와 지도력과 관리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와 경제가 복합된 국가적 위기상황을 총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입장에서 서보지 못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어느 한쪽의 능력으로 전체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위기관리는 지도자의 ▲판단력 ▲결단력 ▲자기희생의 각오가 조화를 이룰때 보다 효율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때로는 지도자의 건강상태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김영삼민자·김대중민주당대통령후보는 80년 서울의 봄,87년 시민항쟁의 승리후 그들에게 굴러온 절호의 기회에 두번 다 상황을 오판했다. 그들은 80년의 경우 신군부의 집권욕을,87년의 경우 안정희구의 보수기득권층의 두터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욕심만 드러냈을뿐 자기희생할 마음은 추호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화와 정권교체의 두마리 토끼를 모두 놓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점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겐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을때 두 김씨가 제대로 수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가 여전히 미씸쩍다.
또 정주영국민당대통령후보는 개발경제체제의 특혜풍토에서 현대왕국을 축성해낸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였지만 80노령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엮어내는 국가적 위기를 과연 관리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는 특히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라는 성격상의 문제,고령때문에 국가위기관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를 의심받고 있다. 현대 노조파업때 김일성의 사주를 받는 세력이 침투해 있었다고 비난했던 정 후보는 공산당결성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가 말썽이 일자 변명에 애먹고 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흔들림없는 국정수행이 가능하겠느냐고 비판자들은 지적한다.
김영삼후보는 위기에 봉착하면 물러서지 않고 맞붙어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스타일이다.
72년 미국 방문중 박정희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했을때 미국측은 YS에게 당분간 미국에 있으면서 사태를 관망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귀국했고 유신체제와 정면대결하는 투쟁노선을 선택했다.
반면 김대중후보는 위기가 발생하면 일단 후퇴해 태세를 갖춘후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유신선포당시 그도 미국방문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지 않고 일단 정치망명을 택했다. YS와 마찬가지로 그도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신타도운동을 벌였다.
두 김씨의 목숨건 투쟁과는 달리 정주영후보는 사업상 난관에 처했을때 세불리하면 능소능대한 대처를 했다.
조윤형최고위원이 탈당하자 정 후보는 대뜸 김영삼후보의 공작으로 몰아쳤다. 조 의원의 탈당이 정 후보의 독단적 당운영에 대한 반발의 결과라고 국민당의원 일부까지 말하고 있는 사항임에도 김 후보가 조 의원을 한번 만났다는 사실을 낚아채 반전을 시도한 것이다.
김영삼정치의 특징은 결단이다. 그는 87년 펴낸 『나의 결단』에서 썼다시피 70년의 세대교체론에서부터 83년 단식투쟁에 이르기까지 고비때마다 특유의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김 후보는 결단의 밑바탕을 늘 민심에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평생을 통해 무모함과 대담성의 극치라 할 수 있는 90년의 3당합당결단과 그 후의 위기타개상황을 보면 매우 위태위태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후보는 결단의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환경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축성형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그의 정치행태를 따져보면 급진적이라는 그의 대외적 이미지와는 달리 뜻밖에도 온건하다.
그가 행동으로 독재정권에 정면 도전한 것은 76년 명동시국선언문 발표사건과 85년 귀국이후의 민추협공동의장활동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정주영후보는 기업경영에서 독창적이라 할만한 순발력으로 위기를 타개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80년대 중반 원유가의 하락으로 재정사정이 악화된 이라크가 현대건설 공사대금 수억달러를 이런저런 핑계로 주지않아 공사가 중단되고 현대에 위기가 닥쳤을 때다. 그는 이라크로 날아가 현장근로자들에게 꽹과리를 쳐서 열심히 공사하는듯 위장시키고는 그것 등을 이유로 결국 미수금을 받아냈다고 한다.
위기는 돌발적으로 오기도 하지만 누적된 상황의 결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지도자의 선견능력이 있다면 누적되어 일어나는 위기상황은 사전에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다.
두 김씨는 이점에서 다소 불안감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김영삼씨는 지나치게 상황을 단순하게 판단,낙관해 71년 대통령후보경선,80·87년의 상황을 모두 그르쳤다.
김대중후보는 너무 생각이 많아 상대방을 불안하게 하고,또 스스로 화를 자초하기도 한다.
김대중씨는 86년 건국대사태이후 군부의 반용공움직임 등으로 정국이 초경색사태가 되자 장고끝에 직선제 개헌조건의 대통령불출마선언을 해서 자기족쇄를 채우는 오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큰 원칙이나 명분을 어기거나 굽히는 일은 좀체로 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벌어 치밀한 논리와 대응전략을 세워 조직적으로 반격·돌파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단 후퇴했을 뿐이다.
두 김씨는 모두 여론에 기대어 반전을 시도하는 등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수법을 즐겨 사용한다.
김대중후보는 87년 6·29선언직후 『정치가로서 국민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며 목포·광주행을 통해 「여론」을 폭발시켜 대통령출마의 길을 열었다.
김영삼후보 역시 산으로 가거나 마산·제주도로 내려가는 등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마다 의외의 「깜짝쇼」로 국민의 시선을 끌어들인뒤 이를 무기로 집중공세를 퍼부었다.
정씨는 짧은 정치경력 속에서도 위기상황에서는 강도높은 반격과 논리를 넘어서는 뚝심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당 창당과정에서 현대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창당 방해조짐이 나타나자 노 대통령에게 준 정치자금을 공개해 위기를 넘기는 등 다소 비신사적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독한 일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에서 오는 노인 특유의 독단과 고집때문에 일을 그르칠지 모른다는 우려도 받고 있다.
특히 그는 출입기자도 몇달이 지나야 기억할 정도여서 김광일최고위원이 『제발 사람얼굴을 기억해달라』고 주문해 국가최고지도자로서의 적격성에 시비를 받고 있다.
위기국면을 맞을때 3자의 처리방향은 뚜렷이 대비될 것 같다.
김영삼씨가 일단 일을 벌여 놓은뒤 합리화하는 유형이어서 돌파력은 있으나 준비성이 미흡한 반면,김대중씨는 논리적 근거하에 행동하는 유형이어서 계획성은 있으나 지나치게 조심하는 경향을 보일 개연성이 높다.
정주영씨는 행동하면서 그때 그때 자기합리화를 해나가는 스타일이어서 적응력이 탁월하지만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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