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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10. 이순용 이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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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늘의 한국골프가 있게 된 데는 서울컨트리클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골프장도 없었고, 골프단체도 없었던 그 시절에 서울컨트리클럽이 모든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서울컨트리클럽을 이야기하자면 이순용 초대 이사장을 빼놓을 수 없다. 1929년 1월에 착공, 이듬해에 개장한 군자리 골프장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농경지로 변했다.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군자리 골프장 복구를 지시한다.

그 사연은 이렇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수립 1주년 기념 축하연에 초대된 주한 미군 장성들에게 "휴일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충격적인 대답을 한다. "한국엔 골프코스가 없어 휴일이면 부득이 군용기를 타고 일본 오키나와로 가서 골프를 즐깁니다."

이 대통령은 즉시 총무처장을 불렀다. 그리고는 "조속한 시일 내에 골프장을 건설하라"고 지시한다. 유사시 주한 미군 고위장교의 국내 복귀가 더뎌질 경우 국토방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부는 검토 끝에 군자리 골프장을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농경지를 경작하던 소작농의 잦은 시위로 코스 복구 작업은 쉽지 않아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복구 공사는 1950년 5월 마무리됐다. 하지만 비운의 군자리 골프장은 한국전쟁으로 다시 문을 닫았다.

이순용 이사장은 당시 외자청장(지금의 조달청)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청장은 군자리 골프장 복구의 책임자였다. 1953년 11월11일 군자리 골프코스를 운영할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가 창설됐고, 자연스럽게 초대 이사장에 오르셨다.

이순용 이사장은 키가 작으셨지만 아주 깐깐한 분이셨다. 골프와 관련해서는 그 분 말씀이 곧 법이었다. '양성자 과정'을 만든 것도 그분이셨다. 골프를 정말 사랑하셨던 그분은 라운드를 하시다가도 잡초를 발견하면 골프를 중단하고 그것을 다 뽑아낼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서울컨트리클럽 직원 골프대회에서 우승하고 난 뒤 처음 가까이에서 뵙게 된 이사장은 "자네가 한장상인가, 열심히 해봐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분은 항상 말머리에 "자네가"라는 단어를 붙이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제3회 KPGA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장상이를 국보로 키워야 합니다"라고 소개하시곤 했다.

내가 1962년 군에 입대할 때도 이사장은 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셨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셨던 김종호 장군을 설득해 "훈련소에서 기초적인 것만 배우게 한 뒤 골프훈련을 시켜달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국방부 소속으로 근무하면서 골프채를 놓지 않았던 것도 이사장님의 도움 덕이었다.

나와 라운드를 할 때 내가 실수라도 하면 "자네가, 그렇게 해서 되겠나. 유명 선수가 되려면 머리도 잘 써야지"라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또 "골프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다. 그 분은 내 골프인생의 최대 후원자였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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