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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국산 1호 비행기 '부활' 찾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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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금으로부터 꼭 1백년 전인 1903년 12월 17일 오전 10시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 해안에서는 라이트 형제가 세계 첫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미국에선 지난 12일부터 라이트 형제의 야외실험장에 20여만명이 모인 가운데 1백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축제를 벌이고 있다.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이후 50년이 지난 53년 10월 10일. 한국 사천기지에서 국산 1호 비행기가 완성돼 시험비행을 성공리에 마쳤다. 정찰.연락 및 초등훈련용 2인승 경비행기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활'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이를 동체 양면에 표시한 뒤 54년 4월 3일 성대한 명명식을 치렀다. 그러나 '부활'은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당시 공군 소령으로 '부활'의 제작을 주도했던 이원복(李元馥.77.사진)씨가 이 비행기를 애타게 찾고 있다. "명명식을 치르고 1년간 미국 연수를 다녀와보니 '부활'이 행방불명됐어요. 당시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35년이 지나서야 미 공군 군사고문단에서 '부활'을 시험평가하기 위해 미국 본토로 가져갔다는 소식을 듣게 됐죠."

李씨는 그후 '부활'이 미국 세스나 항공기 제작회사로 갔다는 풍문을 듣고 여러 방면으로 세스나사에 조회했으나 알 만한 사람도 없고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99년 공군이 사진과 제원을 토대로 '부활'을 거의 실물대로 복원,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지만 아쉬움은 여전했다.

"휴전협정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53년 6월 공군기술학교 김성태 교장이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용된 나에게 비행기 설계 제작을 요청했어요. 서울대 항공공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설계도를 만든 뒤 여름방학 동안 미 공군에서 부품을 받아 4개월 만에 완성했죠. 첫 시험비행에 성공할 때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李씨는 64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에도 '부활'을 그리워하며 비행기와 평생을 함께 했다. 대한항공 전무 등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도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89년부터 올해까지 미국실험항공기협회(EAA) 한국지회장을 맡아 매년 미 위스콘신주 아시코시시에서 열리는 '에어 벤처(실험기 경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왔다. 92년에는 미 시애라 비행학교를 수료하고 자가용 비행기 조정면허를 따내 현지 지역신문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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