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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8. 연습벌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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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2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 대회 경기 모습.

내 골프인생에서 두 번째 행운이 찾아온 것은 1956년이었다.

군자리에서 골프를 즐기던 미국 대외원조처(USOM) 요원들이 서울컨트리클럽의 모든 직원과 캐디가 참가하는 대회를 열어준 것이다. 상품으로 1등 윌슨 아이언 풀세트, 2등 우드 한 세트, 3등 퍼터를 걸었다. 나는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풀세트를 갖게 됐다.

고가 장비가 생긴 나는 시간만 나면 클럽을 휘둘렀다. 본격적인 골프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컨트리클럽에서 골프선수 육성을 위해 만든 '양성자 과정'에도 들어갔다.

이름도 이상한 '양성자'는 캐디 마스터가 관리했다. 손님 구두닦기 등 힘든 일과가 끝나야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조금만 실수하면 온갖 욕설이 쏟아졌다. 나는 그때 숱한 고생과 좌절을 겪었지만 '한국 최고 골프선수가 되겠다'는 일념에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격려는 정말 큰 힘이 됐다.

좌절감으로 연습을 게을리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아버지는 "이놈아, 놀아도 골프장에 가서 놀아라. 그래야 네가 뭐가 돼도 된다"며 나를 연습장으로 몰아냈다. 나는 '연습벌레'처럼 손이 부르트도록 훈련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은 당시 서울컨트리클럽 양성자 과정 참가자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다.

58년 6월 12일.

한국에서 제대로 된 골프 대회가 열렸다.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이다. 지금은 연간 10여 개의 대회가 열리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회다운 대회가 없었다. 서울컨트리클럽을 중심으로 "이제 한국에도 정식 대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돼 선수권대회가 탄생한 것이다. 대회에는 연덕춘 프로를 비롯한 20여 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는 4라운드 동안 단 한 번도 70타대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7위(342타)를 차지했다. 희망을 발견한 것이었다. 연덕춘 프로가 4라운드 합계 18오버파 306타로 우승했다.

그 대회를 치른 뒤 나의 훈련량은 더욱 늘어났다. 우승이 목표였다. 과연 내가 하루에 몇 개의 공을 때렸나 하는 계산도 해봤다. 그때는 일일이 삽으로 공을 퍼서 손수레에 담아 날랐다. 나는 한 손수레에 가득 공을 담아 놓고 연습했다. 날이 밝을 무렵에 연습을 시작, 해가 져 어둑어둑해져서야 끝냈다. 내가 그날 때린 공의 수는 정확히 3620개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위치를 누르면 기계에서 공이 자동으로 나오는 게 아니어서 맨땅 위에 일일이 공을 놓고 스윙했다. 요즘같은 자동연습기가 있었다면 6000개쯤은 때렸으리라.

손이 부르트는 것은 예사였다. 손에 못이 박이면 면도날로 깎아내면서 샷을 단련했다. 여러분도 한 번쯤은 하루에 몇 개의 연습공을 쳤는지 헤아려 보시라.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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