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보듬는 건 통일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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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청년을 위한 야간학교인 '피난처 자유터학교'의 조명숙(趙明淑.34)교장을 인터뷰하기는 참 어려웠다. 전화하자 그는 "수십번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며 겸손하지만 단호하게 취재를 거절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을 이용해 매스컴을 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는 거였다.

"탈북자의 실상을 알리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자"는 거듭된 설득에 그는 기자를 학교로 안내했다.

서울 구로구 구로3동 지하철 2호선 대림역 인근의 한 골목 반지하방. 5~6평 남짓한 방바닥엔 냉기가 감돌았지만 학생들의 면학 열기는 후끈했다.

올 1월 문을 연 이 학교의 학생은 40여명의 탈북 청년들. 현재 대학생이거나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이다. 이들은 8명의 내외국인 자원봉사자에게서 중국어와 영어를 배운다. 학교 운영을 도맡아 하는 조씨도 영어 한 과목을 가르친다.

*** 40명 5평 반지하방서 향학열

"학생들이 특례 입학으로 대학엔 갔지만 학업공백 때문에 공부를 따라잡기가 힘들어요."

경제적 어려움도 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공부가 소홀해지고 건강도 버티기 힘든 악순환이 계속된다. 때문에 대학 진학자의 절반 정도는 중도 탈락하고 만다.

"탈북자들이 게으르다거나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도와주려고 나섰다가 그들이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해 기가 질려하는 이들도 있지요. 어린 나이에 조국을 등지고 수년간 이국땅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다 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조씨는 시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제가 살림을 잘 못해요.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항상 '이만하면 잘 했다'고 말씀하시지요. 저는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자신감이 생겨요. 탈북자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도 저의 시어머니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을 힘겹게 해나가는 그녀가 웃음을 잃지 않고 씩씩한 모습을 지닐 수 있는 비결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조씨는 "탈북자들의 상처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일이야말로 통일에 대한 예행연습"이라는 말을 몇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녀가 탈북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꼭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조씨가 단국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3년. 집으로 걸려온 잘못된 전화 한 통을 받고 그녀는 폭발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한 파키스탄 출신 노동자를 20여일간 간호하게 됐다. 환자가 죽기 전 깨어나 그녀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누나! 진심으로 고마워!"

"이 한마디가 저의 일생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환자가 사경을 헤매도 진심으로 간호한 것은 알았구나 싶었어요."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직 조씨만을 믿을 수 있다는 파키스탄 노동자들에게 떠밀려 그는 산업재해 보상에 나섰고 당시 '평균 목숨값'의 8배가 되는 4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아냈다.

*** "자장면밖에 못사줘 가슴 아파"

이 때부터 조씨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살았다. 외국인 근로자의 산업재해 보상과 중국동포 취업 사기 문제 해결에 뛰어들었다. 이를 위해 중국에 가서 활동하는 동안 1997년 탈북자 문제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를 신뢰한 중국동포들이 탈북자들을 소개시켜줬던 것. 그들을 구호하기 위해 백두산과 두만강 지역을 넘나들고 급기야 오갈데 없는 탈북자들과 함께 베트남까지 가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같은 일을 하던 남편 이호택씨와 결혼해 현재 네살.두살 된 남매를 두고 있다. 이씨 또한 직장을 다니면서 버마.쿠르드족 등 국내에 있는 외국인 난민을 돌보는 '피난처'를 운영하고 있다.

요즘 들어 자유터학교는 매일 한명 꼴로 학생이 늘고 있다. 한편으론 즐겁지만 그와 비례해 조씨의 걱정 또한 커졌다.학생들에게 저녁밥으로 자장면.사발면 등을 먹이는 값에다 월세금.관리비 등은 월 1백50만원의 후원금으로 감당키 어려울 정도가 됐기 때문. 그래서 요즘엔 슬며시 자기 몫의 자장면은 주문하지 않을 때도 많다.

"못 먹어 고향을 등진 아이들에게 배불리 먹이지 못하니 가슴이 아릴 때가 많아요."

그녀의 눈가가 순간 붉게 물드는가 싶었는데 곧장 활달하고 큰 목소리로 희망을 얘기한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주간 학교를 열고 싶어요. 간절히 소망하면 언제가는 이뤄지겠지요."(자유터학교 0505-446-4646)
문경란 여성전문기자moonk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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