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방을 엿보니 우리 시대가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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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02면

김월식 작, ‘노아의 방주’ 

미술관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벌건 대낮이었다. 4월 27일 석양 무렵, 쌍쌍이 플로어를 누빈다.

‘딜레마의 뿔’전 # 5월 31일(금)까지 일민미술관 # 문의: 02-2020-2055

한국식 트로트 ‘아빠의 청춘’에 맞춰 미국식 스윙댄스를 내지르는 남녀 가운데 유독 땀을 흘리는 이가 작가 김월식(39)씨다.

작가 5명을 모아 그들의 작업실을 재현한 전시회 ‘딜레마의 뿔’전 개막 퍼포먼스는 화려하면서도 쓸쓸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미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는 땀 흘리며 온몸으로 묻고 있었다. 트로트와 스윙댄스의 만남만큼이나 잡종·튀기 생산이 많은 한국 미술이 카바레풍으로 답가를 부른다. “오, 빠, 의∼∼ 청춘∼∼.”

남의 방을 엿보는 거야 흥미롭지만 미술가들 방을 들여다보는 건 더 즐겁다. 작품이 생산되는 창작의 산실이 도대체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30대 후반 작가들인 김월식·류현미ㆍ박미나와 사사·배인석·진훈씨가 미술관 1ㆍ2층에 옮겨놓은 작업실은 각양각색 ‘울트라 짬뽕’이다. 대학시절 중간고사 시험문제까지 벽에 붙여놓은 진훈(38)씨가 겪고 있는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1970년대에 태어나서 80,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연필로 그리는 석고상과 정물수채화로 입시를 치르고, 앙포르멜과 아방가르드를 위시한 19, 20세기의 서양미술사조와 이에 반하는 민중미술을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은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버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캔버스들의 무게보다도 가볍고 허무하다. 한 미술경향의 수명은 유행가 가수보다 조금 길 뿐이다. 그래서 가벼움이 요즘 미술 트렌드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월식씨가 미술관에 꾸민 작가의 방은 ‘노아의 방주’다. 수륙양용 기계처럼 파란 불빛이 흐르는 방은 동서양이 이상하게 접목된 공간이다.

박미나(34)씨는 ‘왕자파스 굵은 20색’, 각종 그리기 대회에서 받은 상장, 신문 스크랩 더미까지 알뜰하게 한 미술학도의 30년을 모아놓았다. 한 명의 미술가가 탄생하기까지 투입된 재화와 에너지와 눈물이 그 방에 서려 있다. 한국 현대사가 그림자를 드리운 배인석(39)씨의 방은 미술계 민주화운동 자료관으로도 손색없다. 노래방·빨래방·소주방·비디오방…‘방의 나라’에서 미술가의 방이 내는 목소리가 신선하다.
딜레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혹스러운 처지를 말한다. 화가는 오늘의 미술시장에서 예술가와 장사치, 이상과 생존의 딜레마에 끼여 있다. 이제 뿔을 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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