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마지막 만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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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26면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가 공산화된다. 그날 김일성은 평양을 출발, 중국 방문길에 오른다. 국경 도시 단둥(丹東)엔 차오관화(喬冠華) 외교부장이 마중 나왔다.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시간은 18일 오후 4시쯤. 덩샤오핑(鄧小平) 부총리가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과 함께 나와 영접했다. 김일성은 들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또한 월맹군 승리로 대세가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에 이어 열린 18일 환영 만찬에서 김일성은 호전적 발언을 쏟아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 즉각 개입할 것이다. 전쟁으로 우리가 잃는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의 통일이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 ①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마지막 만남

이튿날인 19일 김일성은 베이징의 305병원을 찾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문병이었다. 저우는 72년 방광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의 오줌만 보고, 방광암에 걸렸는지 아느냐”는 마오쩌둥의 무관심 속에 제때 치료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진을 보면 건강한 모습의 김은 평소의 습관대로 연신 담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반면 75년 3월 세 번째 수술을 받은 저우는 병색이 완연하다. 당시 저우의 증세는 대장으로까지 종양이 퍼져 몹시 쇠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손님이 찾아오면 언제나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왼쪽 가슴엔 문혁(文革) 당시 유행하던 마오쩌둥 배지를 다는 것조차 잊지 않았다. 암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위해 담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세심한 배려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저우는 구두를 신지 못했다. 두 발이 퉁퉁 부었기 때문이다. 대신 특별히 제작한 헝겊 신발을 신었다. 김과 저우 사이엔 침을 뱉는 타구가 놓여 있다. 빨간 카펫이 깔린 접견실은 저우의 병실 옆에 마련된 것이었다. 이날 김일성과 저우의 회담은 30년대 이래 의형제 관계였던 두 사람 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저우는 이듬해 1월 8일 사망했다. 78세.
 
김명호(57세)교수는
건국대ㆍ경상대 중문과 교수를 거쳐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해외에서 중국 전문서점으로 유명한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을 10여 년 경영하며, 중국 관련 전문서적과 희귀 사진을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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