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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관 “농축 계획 없지만 美와 검증 용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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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06면

2차 북한 핵 위기는 고농축 우라늄 계획(HEUPㆍHighly Enriched Uranium Program)에서 비롯됐다. 2002년 10월 미국이 이 계획을 추궁하자 북한이 인정했다고 발표한 것이 발단이다. 이후 북한은 발뺌했고, 다른 루트인 플루토늄 핵 개발로 치달았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최근 대북 정책을 선회하면서 HEUP에 대한 정보 판단 수위를 낮추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HEUP를 어물쩍 넘길 수는 없다. 미국의 체면이 걸려 있다. 부시는 이라크전 명분으로 내걸었던 대량살상무기 정보를 확인하지 못해 만신창이가 됐다. HEUP 문제는 어떻게 위기로 비화했는가. 국내외 당국자와 전문가 인터뷰, 외신 보도를 통해 그 전말을 재구성하고 해법을 점쳐 본다.

6차 6자회담과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 참석을 우해 17일 중국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 도착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취재진들에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2001년 11월 워싱턴.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미국의 핵 연구소인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가 작성한 극비 보고서가 부시 행정부에 전달됐다. 연구소 측은 사람을 보내 직접 문건을 건넸다. 사안의 폭발성 때문이다. 정보원은 파키스탄 과학자들이었다. 파키스탄과 북한은 핵과 미사일 기술을 맞바꿔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를 밀쳐놓았다.

9ㆍ11 테러 직후라 대책 마련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워싱턴 포스트)

2002년 6월.
미 중앙정보국(CIA)은 북한의 HEUP를 확인했다. 국가정보평가(NIE) 보고서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설비를 건설하기 위한 재료를 구입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특수 1급비밀로 분류됐다. 배부처도 극히 제한됐다. 행정부의 군축 부서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 문제를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듬해 3월의 이라크 전쟁 작계 준비에 들어갔다. (『공격 시나리오』, 밥 우드워드)

CIA 정보 판단에는 미국과 파키스탄 간 새 협력 관계가 결정적이었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대테러전 와중에 피제재국에서 동반자로 부상했다. CIA는 99년 NIE에선 “북한의 비밀 핵 계획과 관련한 장비 획득을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2000년에도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파키스탄의 정보 제공 없이 새 판단은 나올 수 없었다.

7월 31일 브루나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과 백남순 북한 외무상(사망)이 회동했다. 15분 동안의 커피 브레이크였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최고위급의 만남이었다. 파월은 그러나 북한에 HEUP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너선 폴락 미 해군대학 교수는 “이라크전에 사로잡힌 미 행정부는 다른 지역 문제로 초점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HEUP는 열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였다. 미국은 당시 두 개의 전선을 원치 않았다.

8월 28일 서울.
존 볼턴(후에 유엔 대사) 미 국무차관이 북한의 HEUP 추진 정보를 처음으로 한국에 전달했다. 이태식 (현 주미대사) 외교부 차관보한테다. 볼턴은 다음 날 이준 국방부 장관에게 다시 통보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개혁ㆍ개방 움직임 때문이었다. 북한은 7월 1일 가격체제 개혁과 인센티브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한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시작했다. 8월 30일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9월 17일 방북이 발표됐다. 둔감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일본에 잇따라 주의를 환기했다. 브루나이 ARF, 볼턴 방일(8월 24~28일)에서다. 파월은 고이즈미 방북 직전인 9월 12일 가와구치 일본 외상에게 HEUP 문제를 전면에 꺼냈다.(『김정일 최후의 도박』, 후나바시)

고이즈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회담에서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전하면서도 HEUP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9월 25일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 계획을 발표했다.

10월 3일 평양.
켈리가 도착해 북ㆍ미 양자회담이 시작됐다. 부시 행정부 출범 후 처음이다. 북측 수석대표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 회담은 시작과 동시에 파국을 맞았다. 켈리의 HEUP 제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HEUP 정보를 확인했다”며 즉각 가시적인 해체를 요구했다. 김계관은 당황하면서 “날조”라고 맞받아쳤다. 회담은 겉돌았다. 북한은 이날 밤 당ㆍ정ㆍ군 대책회의를 했다. 그 결론이 북핵 2차 위기를 몰고 온다.

회담 둘째 날. 북측 수석대표가 바뀌었다.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나왔다. 그는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켈리는 그 해 12월 11일 이렇게 밝힌다. “강석주는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HEUP를 추진하고 있으며, 제네바 합의는 무효화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번엔 미국 대표단이 놀랐다. 시인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표단은 이날 북한이 HEUP를 인정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강석주 발언은 두고두고 논란의 불씨가 된다. 북한이 HEUP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다가 전면 부정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10월 17일 서울과 워싱턴.
한ㆍ미 양국은 “북한이 HEUP를 시인했다”고 발표했다. 북핵 2차 위기의 태동이었다. 한ㆍ미ㆍ일은 당초 이 사안을 10월 27일 멕시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다룰 예정이었다. 그러나 USA 투데이에 정보가 누설되면서 서둘러 발표했다. 클린턴 행정부 때의 제네바 합의에 불만을 품어온 강경파가 흘린 것으로 추정됐다.

10월 25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담화를 냈다. 첫 공식 반응이었다. “미국 특사는 아무런 근거 자료도 없이 우리가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농축 우라늄 계획을 추진하여 조ㆍ미 기본 합의문을 위반하고 있다고 걸고 들면서… 우리는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 담화의 논조는 HEUP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런 기조는 11월 2~5일의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방북 때까지 이어진다. 그는 “북한 관리들은 우라늄 농축 추진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1월 19일 워싱턴.
CIA는 의회에 북한 HEUP에 대한 정보 판단을 보낸다. 다음은 미 과학자연맹(FAS)이 공개한 CIA 보고서 요지. ▷북한이 약 2년 전부터 원심분리기에 바탕을 둔 우라늄 농축 계획에 착수했다. ▷지난해 북한은 원심분리기와 관련된 자재를 다량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완전 가동할 경우 매년 2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CIA는 그러나 공장의 장소는 지목하지 못했다. 이 내용은 당시 한국 정부에 통보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2003년 8월 27일 베이징.
1차 6자회담이 개막됐다. 김영일(외무성 부상) 북한 수석대표는 HEUP를 전면 부정했다. 기조 발언에서다. “…우리는 (켈리 방북) 당시 우리에게는 그 어떤 비밀 핵 계획도 없다는 데 대해 명백히 하였다. (미국이) 우리의 감정을 심히 손상시켜 그에 대한 답으로 농축 우라늄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일심단결을 비롯하여 그보다 더 강한 무기가 있다”고 말했다. 켈리에게 시인한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심단결 등의 ‘정신적인 것’이라는 얘기였다. 미국 흔들기였다. 미국은 그해 이라크를 점령하고도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2004년 2월 2차 6자회담.
“당신은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제3국도 알고 있다.” 켈리는 북측 수석대표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HEUP를 털어놓으라는 압박이다. ‘제3국’은 파키스탄이다. 그러나 김계관은 “없다”고 되받았다. 2005년 7~9월 4차 6자회담. 미국은 처음으로 HEUP에 관한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그해 8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 연설). 그러나 북한이 계속 부인하자 미국은 묘수를 냈다. 공동성명의 핵 포기 대상에 HEUP 표현을 쓰지 않되 의미상 포함하는 방식이었다. 9ㆍ19 공동성명은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으로 됐다. HEUP는 ‘현존하는 핵 계획’에 들어간다는 논리다.

2007년 2월 27일 워싱턴.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계획을 위해 필요한 장비를 획득해 왔다는 데는 강한 확신이 있지만 이 계획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선 중간 수준의 확신이다.” 조셉 디트라니 국가정보국 북한 담당관은 HEUP에 대한 판단 수위를 낮췄다. 원심분리기 등은 들여왔지만 그것이 고농축 우라늄 생산으로 이어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도 다소 유연해졌다. 그 일 주일 후 뉴욕에서 열린 북ㆍ미 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 “우리는 고농축 우라늄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의심스러우면 증거를 내놔라.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 문제를 전문가들끼리 논의할 수 있다.” 김계관은 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17일 한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HEU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베이징 공항에서다.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내비친 것이다.

HEUP는 곧 ‘진실의 순간’을 맞는다. 북한은 다음달 14일까지 폐기해야 할 핵 계획 목록을 협의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모든 핵 계획을 신고해야 한다. 북한이 핵 포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렸는지는 이에 대한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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