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기법「관행」으로 평가 말자|표절시비 「내가 누구」작가 이인화씨의 반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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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기존의 여러 작품에서 따온 「혼성모방」은 포스트모던한 기법인가, 표절인가. 자신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가 혼성모방이라는 한 「기법」을 취하고 있다는 작가 이인화씨의 주장에 대해 평론가 이성욱씨는 단지 표절이라고 주장했다(중앙일보15일자 13면 보도). 이 같은 평론가 이씨의 주장에 대한 작가 이씨의 반론을 싣는다. 【편집자주】
이성욱씨의 좋은 평론에 감사드린다. 『내가 누구인지…』의 세계관·창작방법을 비판한 그의 평문은 스스로의 작품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의 비판에 충분히 공감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하는 포스트모턴한 상황이 이미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80년대 이후 우리가 이념 선택의 첨예한 갈등 속에서 배운 기존의 관념으로 오늘을 비판하고 「역사의 방향성 상실」을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대착오적인 모든 것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시대를 견디게 하는 「나」의 근거, 자기 존재의 새로운 근거를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이 말은 다시 그가 내 소설이 가져온 몇 가지 원전을 들어 비판한 나의 창작방법에 연결된다. 작가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비판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내가 여사여사한 곳에서 베꼈다고 주장하는 이성욱씨의 예증은 전부 옳다. 특히 소설에 등장하는 정임의 「나」에서 나의 문장은 하나도 없다. 또 하나의 인물 은우는 현실의 나를 재현한 「나」로, 정임은 현실에 아무 근원이 없이 다른 소설 속의 나를 베낀 「나」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애초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해설로 써서 밝혔다(「재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질문」책 마을 3월25일자).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없는 우리 시대의 근원적 위기를 전혀 다른 창작방법으로 만들어진 두 주인공의 「나」가 사실은 똑같은 「나」라는 사실로 보여주고 싶었다. 왜 그런 기법을 소설 속에 정확히 명기해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다른 글로 밝혔느냐는 항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소설 속의 소설로 들어가는 박분도-이은우의 대화에서, 그리고 소설 속의 소설에서 소설로 나오는 마지막에서 나의 기법을 충분히 암시하고 자세한 사정은 따로 해설로 밝히는 방법을 택했다.
또 무순 문제가 있을까. 이성욱씨의 요지는 나의 해설에서 왜 특정한 작가의 혼성모방만 밝히고 다른 작가들을 밝히지 않았느냐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이 기법의 의의를 폄하하는 것이다. 나는 멀리는 니체에서 가까이는 공지영까지 많은 작가들을 짜깁기하여 정임이란 인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정임은 어느 작가의 것도 아닌 또 다른 무엇이다.
그녀는 현실 속을 걸어 다니는 다른 인물이 가진 「나」의 의미에 의문을 던지는 이 소설의 텅빈 중심이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의 「나」란 내 욕망의 모델들을 짜깁기한 환상이다.
혼성모방이란 소설 속에 「믿을 수 없는 나」를 만드는 기법이다. 현실 속을 걸어 다니는 어떤 인물을 재현한 것이라는 「재현」원칙을 포기하고 현실에 「기원」이 없는, 다른 많은 소설들의 모사로 이루어진 나를 만든다.
이 기법이 이 소설에서 얼마만큼 적실하게 구현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재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창작방법은 처음부터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작가의 소밀, 문학에서 「문학적 경험」으로의 이행, 새로운 소설 쓰기의 모색을 이제까지의 경직된 관행으로만 재단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기법이내 소설의 주제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것이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내 소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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