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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권근의 「입학원설」새겨진 추원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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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려의 왕업이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열리는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 당의 지식인들은 학문의 체계를 세우고 시를 짓기에 벼루의 먹물이 마르지 않았다. 역성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폭풍이 불던 저 격동의 전환기에 성리학의 이론을 정립하고 시의 대하를 이룬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양촌권근이다 .
서울에서 중부 고속 도로를 타고 한시간 남짓 가면 음성인터체인지가 나온다. 거기에서 동쪽으로 약 50리쯤 거리에 권근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추원재(음성군 생극면 방축리)가 있고, 그가 두 왕조를 섬긴 영욕이 잠든 무덤이 있다.
양촌 권근은 공민왕 원년(1352년) 11월6일 안동 권씨 가문에서 검교정승 벼슬을 하는 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릴 때 이름은 진이었고 자는 가원 또는 사숙이었다. 17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다음해 문과 전시에 급제하여 춘추검열에 제수되는 등 그는 조숙한 학문과 함께 벼슬길도 발빠르게 나가기 시작한다.

<18세 때 전시 급제>
18세의 어린 나이인 그를 전시에 급제시켰다 해서 공민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그의 스승인 이장이 그가 장차 크게 될 사람임을 적극 변호하여 등용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34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성균관 시험을 관장하는 등 그는 학자로서, 현실 정치인으로서 큰 활약을 하게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당시의 새 학문적 조류였던 성리학에 깊이 천착해서 이색·정몽주·이숭인 등과 함께 유교사상의 학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명나라가 새로운 기운으로 일어서고 있어서 고려의 조정도 친명파와 친원파로 갈리고 있었다. 권근은 이색·정몽주·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 정책을 주창했고 우왕원년(1375년)에는 원나라에서 오는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성품이 곧고 직간을 서슴지 않는 그는 공민왕과 우왕에게 정사를 바로 잡기를 바라는 많은 상소를 올렸는데 우왕은 그의 상소문을 옮겨 적어 병풍에 붙이고 실천에 힘썼다고도 한다. 그러나 고려의 왕권은 빛을 잃기 시작했고 이성계의 혁명의 꿈이 무르익고 있었다.
우왕14년(1388년)이성계는 위화도 회군과 함께 실권을 장악, 왕위를 폐하고 창왕을 옹립한다. 그러나 왕씨 혈통이 아닌 요승 신돈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시 몰아내고 공양왕을 앉힐 계획을 세운다. 창왕 1년 권근은 윤승순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올 때 예부의 자문을 미리 보았다는 죄목을 받게 된다. 그 자문은 명의 왕실에서 창왕의 혈통을 시비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중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권근이 모함을 방은 것이라는 설이 있거니와 이때 이성계의 배려로 목숨을 건져 황해도 우봉으로 귀양가게 된다.
그해 12월 우봉에서 영해로, 다음해에는 금해·청주 등으로 전전하다가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다시 이성계를 무고하는 이초(윤이와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연산으로 유배된다. 이 역시 이색·이숭인·권근 등을 미워하는 무리들의 계략 때문이었다.

<유배 중 경학 몰두>
그러나 그는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경학에 몰두하여 익산에 와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서를 그림으로 풀어가며 해석을 불인 당대의 명저 『입학도설』을 완성한다. 이 『입학도설』은 후일 이황·장현광 등에 크게 영향을 준다.
익산에서 종편(귀양에서 풀려남)된 그는 충주 양촌에 와서 다시 『오경천견록』을 저술했는데 이황이 『양촌의 학문이 깊고 넓음은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저술한 것으로 증거가 된다』고 퇴계 집에서 밝힌 것으로 미루어도 두 저술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한다.
그가 이렇듯 적소에서 경학사상의 이론을 정립하고 있는 동안 이성계가 정몽주 등 반대파틀 제거하면서 조선왕조를 개국하는 큰 변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고려의 지식계급들은 충절이냐, 새 역사의 흐름에 동참할 것이냐를 놓고 갈등과 좌절을 겪는 시기이기도 했다,
천고의 충절 정몽주를 비롯해 수많은 고려의 유신들이 더러는 순절하고, 더러는 하늘을 가리고 사는 은둔을 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을 때 이성계는 개국에 필요한 재목들을 하나씩 골라내고 있었다.
태조2년 이성계는 계룡산에 행차하는 길에 양촌에 묻혀 사는 권근을 불러낸다,
새 왕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큰 재목을 필요로 했던만큼 그의 사람됨과 학문의 깊이에 비교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계를 따라 서울로 올라오게 되고 정도전과 함께 조선을 개국하는 두개의 기둥이 된다.
평소에 따르던 정몽주·이숭인 등과 길을 달리하여 두 임금을 섬기게된 권근으로서 어찌 갈등과 고뇌가 없었으랴. 그러나 인식의 전환을 하고 현실을 좇은 일로 하여 충절만이 최고의 선으로 값쳐주던 조선조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굴절되기도 한다.
중종 때의 이름높은 송인수·김안국 두 학자가 어느 집에서 권근의 초상을 보게 되었는데송인수는 「절의를 꺾은 사람」이라고 절을 하지 않았고 김안국은 「이 나라 도학에 크게 공헌한 분」이라고 절을 했다는 일화에서도 그에 대한 엇갈린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권근은 「용진을 건너며」라는 시를 썼다.
푸른 파도에 밀려
거룻배가 흔들리는구나
쉽게 건너려면
평탄한 길도 있는 것을
지나간 일 까마득치
꿈만 같은데
떠서 사는 목숨 허덕이느라
한가로운 날 언제였더냐
세상살이에 험 뜯기고
이름마저 더럽혔는데
벼슬길 오르내리는 일
간담이 서늘하구나
내 영천에 가서
귀를 씻지 못 하였으니
맑은 강물에 비친 얼굴이
너무도 부끄럽구나
요임금이 세상을 맡으라고 하자 영천에 가서 귀를 씻고 기산에 숨어들었다는 허유의 고사는 너무 귀에 익어있다. 권근은 양평의 용진(한강)을 건너며 스스로 허유가 되지 못한 것을 시로 읊은 것이다. 「푸른 파도에 밀려 흔들리는 거룻배」에서 보듯 현실의 큰 흐름에 덧없이 흔들리며 살아야했던 지식인의 통렬한 고뇌가 가슴을 친다.
권근은 당대에 우뚝한 학자이면서 또한 더불어 짝을 찾을 수 없는 대시인이었나. 『양촌집』40권 중에 시집이 10권으로 수록된 시가 9백수나 되니 하늘이 그에게 준 시재가 어떠한지를 헤아리게 한다,

<노여움 풀고 대접>
태조6년(1397년) 표전문제로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권근은 명나라에 갈 것을 자청한다. 표전이란 외교문서로 명나라 태조는 유향이 가기고 간 글 가운데 경박하고 무례한 구절이 있다하여 그 글을 쓴 정도전과 정탁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권근은 명 태조에게 가서 그의 시로 태조의 노여움을 풀고 오히려 후한 대접까지 받는다.명 태조는 「압록강」등 3편의 시를 지어 권근에게 주었고 제목을 내 시를 짓게 했는데 이른바 응제시가 그것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들려오는 말뜻이 있으니
단군께서 하늘에서 내리셨다네
동쪽나라 임금에 오르셨으니
요 임금과 같은 때 였다네
몇 세대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지난해 몇천년이라네
기자대에 내려와서도
이름은 한가지 조선이었다네.
(문세홍황왈 단군강수변
위림동국토 시재제요천
전세부지기 역년증과천
후래기자대 동하호조선)
명나라 임금이 제목을 주어 쓴 응제시는 모두 24편. 그 가운데서 뽑은 단군의 개벽을 노래한 주체정신이 담긴 시다. 그는 이밖에 「금강산」「취나」등 많은 기행시를 남겼으며 시뿐만 아니라 기·서·발·명·차 등의 숱한 명문장을 남겨 『동문선』에 수록된 시문이 1백70편이나 된다.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기에 걸쳐 경학과 시문으로 한 시대를 만든 권근-.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조선조의 선비들은 그가 절의를 굽혔다는 것 때문인지 서원하나 짓지 않았고 향사에도 모시지 않았다.
국립박물관에는 태조4년(1395년)에 권근이 만들었다는 천문도인 「천상렬취분야지도」가 국보228호로 지정, 소장되어 있고 그가 태종 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일본 용곡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그가 경학과 함께 실학에도 일찍 눈을 뜬 선구자임을 일깨워 준다.
추원재는 1985년에 와서야 그의 묘소가 있는 이곳 방축리에 후손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추원재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소 아래에는 이개가 글을 짓고 외손자 서거정이 글씨를 쓴 신도비가 5백년 풍우를 맞다 최근에 와서야 집을 짓고 들어서 있다. 【시인 이상배·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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