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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지않고 40년 수행 조계종 큰어른 청화스님(일요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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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기정화­사회적 실천은 하나”/중생 바른삶 알리러 부처탄신/계율 안지키니 종단분규 거듭
청화스님. 사문이 일세의 선장으로 받드는 그의 주석처는 저 전라남도 곡성 동과산자락에 묻힌 고찰 태안사다.
세수 일흔이 되도록 속계가 그의 이름을 낯설게 여기는 것은 자신을 안으로 여미기에만 힘써 워낙 드러냄에 인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좌불와,40여년간을 바닥에 길게 몸을 대지않고 곧추앉아 지내온 그 철천의 계행과 청정심은 베 한보자기로 사향을 둘러막을 수 없는 이치와 매한가지로 이제 애써 숨기고자 했던 큰스님의 고명을 세간·세출간 위로 그윽히 드리우고 있다.
전설이 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유난히 속퇴자가 많다. 평소 한오라기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수행일도의 그의 장엄한 모습앞에서 제자들이 곧잘 시봉조차 스승의 일상을 따르기 어렵다는 막막한 절망감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일년 가도 서너차례나 될까. 바깥나들이가 드물다는 청화스님을 마침 서울 강남 정중선원의 선학대학 졸업식에 설법차 온 기회의 한 끄트머리를 잡아 만났다. 불기 2536년 「부처님 오신 날」을 닷새 앞둔 5일 아침이었다.
정중선원은 스님을 따르는 문도와 세간 불신자들의 모임인 금윤회에서 서울지역 포교를 목적으로 지난해 세운 선수행도량. 비록 오가는 불자들로 분주한 도심의 잡답 한가운데 자리했다고는 하지만 선원 한구석에 마련된 그의 거처에는 산사가 있는 적막한 동과산계곡의 물소리에서나 묻혀왔음직한 탈속의 맑고 정갈한 기운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스님의 높은 이름만 언뜻 언뜻 듣다가 직접 뵙기는 처음입니다. 근황이며 건강은 여전하신지요.
▲산승의 살아가는 모습이야 예나 이제나 달라질 것이 없지요. 새벽 2시30분쯤 일어나 3시 예불에 참예하고 나면 이후부턴 점심공양과 저녁예불하는 시간을 빼곤 줄곧 좌선에 듭니다. 40년이 넘게 같은 생활을 해왔지만 아직 앓아누워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건강은 좋아요.
­시봉하는 제자들도 지레 도망갈만큼 계행이 철저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도 이른바 장좌불와행을 계속하고 계신가요.
▲글쎄,장좌불와라는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쉬운 일이 아니예요. 젊어선 억지로라도 꽤 오래 불와면벽수행을 했는데 지금은 안그래요. 앉고 싶으면 앉고,눕고 싶으면 눕고….
­10일은 불기 2536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은 어디에 있으며 흔한 말로 「부처님처럼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본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은 우리 중생들이 무명에 의한 미혹된 삶을 버리고 정견에 입각한 바른 삶을 살도록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정견에 입각한 바른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저는 그것이 반고의 도리가 가르치는 무아·무소유의 삶이라고 감히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인연에 따라 잠시 엮어진 일시적 존재에 지나지 않으므로 무아요,이 무아에는 있고 없음이 다 부질없다는 뜻에서 무소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무소유의 진리만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해 간다면 홍노점설,뜨거운 숯불위에서 눈송이가 녹듯 모든 일이 순리로 풀릴 것입니다.
­중생 구제를 이상으로 내걸고 있는 불교가 요즘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사회성,혹은 사회적 실천이 뒤떨어지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자성성불도 좋지만 그것을 사회로 회향시키는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렇습니다. 우리가 소승적으로 「개인적인 개아」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 부처님의 정견과 상충되는 일이지요.
수행하는 사람의 자기탐구는 마땅히 중생과 함께 중중무진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성이라는 것이 원래 일체 만유와 이어지지 않음이 없고,또한 진여불성의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일미평등이라고 볼때 그런 자리에서의 자기정화야말로 곧 사회정화요. 우주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정화와 사회적 실천행위는 절대로 둘이 될 수 없어요.
­일생을 참선수행으로 정진해오신 스님께 불자들이 어떤 자세로 공부해야 할지에 대해 체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먼저 진리의 근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 맹목으로 참선·염불·기도 등을 하다보면 중도에 마가 끼기 쉬워요. 어떤 공부라도 실상에 대한 해오가 우선해야 마음에 갈등이 없고,마음에 갈등이 없어야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이치로 몸도 편한해집니다.
중생이 보는 것은 일체가 인연생이어서 허망무상한 것인데도 그걸 굳이 실존이라고 생각하는데서 번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명병이란 것인데 반고공사상을 모르는 이 무명병이 수행자가 주의해야할 가장 큰 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들어 조계종 총무원이 둘로 갈라서는 등 불자는 물론 일반국민들마저 실망시키는 시끄러운 분규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
▲저도 출가사문의 한사람으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책임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모든게 항상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부처님 말씀을 따르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 봅니다.
­일부 수행불자들 가운데는 계율을 어기는 것을 마치 무애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혼돈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제 경우엔 계율이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계율을 지키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집니다. 계율을 지켜서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 그게 바로 무애행이지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술먹는 것보단 술 안먹는 것이 편하고,거짓말하는 것보단 거짓말 안하는 것이 편하고,여자와 정사하느니보단 안하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아요.
청화스님은 1923년 전남 무안군 운남면 연리에서 태어나 24세때 송만암스님의 상좌인 금타스님을 은사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출가득도했다. 그후 40여년동안 제방의 선지식들을 찾아 전국의 유수 선방과 토굴을 유력하며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해왔다. 오후불식·장좌불와·흑언좌선이 한줄기로 꿰는 그의 수행방법이었다. 88년 나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동과산하 태안사에서 20여명의 도반과 3년동안 일주문밖을 나서지 않는 정진결사를 가진 뒤로 지금껏 그곳에서 머무르고 있다.<정교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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