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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뇌인지이야기

인간성, 그 허무한 망가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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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 소식을 접하면서 뇌와 행동의 관계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갑갑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환경.성격, 모두 중요했을 것이다. 뇌와 기질적 성격도 관계가 있다. 성격에 따라 똑같은 환경도 다르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두뇌의 건강상태가 나쁘면 현실을 심하게 왜곡하기도 하고, 자신의 행동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억울하게 대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을 왜곡하게 될 때 어떤 사람은 단순히 벽을 쳐다 볼 수도 있으며, 이번 사건처럼 거대한 광기를 부릴 수도 있다.

문득 이번 사건에서 범인이 보인 행동이 나날이 예술적이며 선정적인 영화 속 폭력과 피를 낭자하게 흘리는 사이버 게임 속의 세계에서는 신기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 본다. 건강하지 못한 마음, 건강하지 못한 뇌의 소유자가 표출할 수 있는 잔혹함과 그런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환경에 소름이 끼친다. 잔혹한 영화나 게임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도록 산업물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하는 말이 있다. 어느 누가 영화나 게임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겠느냐고.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성인이 있다. 그들은 뇌의 화학적 균형이 깨지거나 뇌에 눈에 안 보이는 결함이 있는 사람이다.

누가 건강한 정신과 두뇌를 가졌는지, 누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구별할 수 있는가? 연쇄 살인범자들의 머리 앞 전두엽 기능이 떨어지더라는 것이 이제야 보고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뇌를 찍어서 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미리 통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보통 사람들도 전쟁터에서 흡혈귀로 변하거나, 위안부를 끌고 다녔던 것도 인간 역사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건강한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선과 악을,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잘 구별하게 하는가? 과학자들은 이런 판단 기능의 뇌의 맨 앞쪽에 있는, 특히 눈 바로 위에 있는 뇌영역(안와전두피질)과 몇몇 두뇌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특히 안와전두피질은 신체로부터 오는 정서의 느낌을 잘 기억해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영역이다. 뭔가 잘못 했을 때 그 뱃속 가슴속 아프고 불쾌한 느낌, 누구나 그 느낌을 알 것이다. 꼭 누구에게 비난받아서가 아니라 그런 느낌을 야기시킬 수 있는 일은 피하도록 행동을 하게 된다. 물론 아이일 때는 이런 능력이 자동화되지 않아 부모님한테 꾸중도 듣고 벌을 받고서야 뉘우친다. 이 영역이 무척 늦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부위가 망가지면 착실했던 원래의 인격도 사라진다. 술집에서 월급을 탕진하거나, 욕설에 멱살을 잡거나, 제시간에 일터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쯤은 흔한 일이다. 논리와 지식과 기억과 같은 지적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 이상 직업을 유지하는 책임감도, 결혼을 유지할 만한 인격도 상실하고 충동적이고 무책임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인생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설사 충동적으로 사고를 쳤어도 그때뿐 다시 그런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인격의 이런 측면이 뇌와 관련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라나는 어린이의 뇌 속에도 이런 자리가 있다. 이 부분에 어린 시절부터 손상이 있었던 아이들에게는 10대가 되어서도 선과 악과 도덕적 판단을 어떤 방법으로도 주입시킬 수 없다.

이번 버지니아공대 사건 범인의 두뇌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파심이 든다. 어느 날 이런 부위가 시원치 않은 사람이 피가 낭자한 게임이나 영화에서 본 난폭한 일상의 경험에서 각본을 얻어 통쾌한 현실로 재현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는가?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이성으로 감정을 조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으로 이성을 조절하는 능력이며, 이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고.

강은주 강원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