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키즈] "시집 간 누나야, 꽃 피면 올거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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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글과 그림으로 쓰이고 그려진 것은 많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은 그것들과 다른 대목이 많은 것 같았다."

소설가 이청준씨가 개막이 고기잡이배, 참외.수박 서리, 누나의 혼사 날 등을 소재로 동화집을 펴낸 까닭이다. '이청준의 흙으로 빚은 동화'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흙 냄새.개펄 냄새.사람 냄새가 풍긴다. 전남 장흥이 고향이라는 소설가의 어린 시절도 화폭처럼 펼쳐진다.

개막이배 선원들과 선원들이 놓친 고기를 하나라도 건지려는 마을 사람들간의 드잡이, 가슴 졸이며 하던 참외 서리가 수박과 닭 서리로 대담해져 간다는 악동들의 서리 이야기가 구수하게 흘러 나온다.

책에 실린 동화 '이야기 서리꾼'에는 손자를 앉혀 놓고 다른 사람의 경험담까지 빌려다 자기 것인 양 말하는 재담꾼 할아버지가 나온다. 그 할아버지에게 작가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은 왜일까.

표제작 '숭어 도둑'에는 준배와 윤배 형제가 나온다. 윤배는 바닷가 양쪽 뭍 기슭을 둘러막아 그 안에 갇힌 고기를 건져내는 개막이배를 무척 반긴다. 어부들이 놓치거나 남겨놓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은 몸싸움이 심한 그곳에 윤배가 가는 게 못마땅하다. 노란색 꿀참외는 형 몫으로 돌아가고 퍼런 개구리참외만 차지하게 되는 처지도 불만인데, 형의 만류가 윤배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형제애란! 귀찮다며 '애국자 외아들'이란 영화 구경에도 동생을 끼워주지 않고, 자존심 상할 말만 골라 하던 형이 개막이배 선원의 억센 손아귀에서 동생을 빼내려 몸을 던진 것이다.

'이야기 서리꾼'에서도 도시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무용담이 이어진다. 이웃 마을까지 닭서리 원정을 나간 이야기가 그 것이다. 오줌독을 주인 안방 마루에 올려놓고 닭장 안에서 닭들을 잡으려는데 닭이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를 듣고 주인이 뛰어나오다 깨진 오줌독에서 흘러나온 오줌에 미끄러졌다는 것이다.

시집간 누나를 그리워하는 '봄꽃 마중'에는 옛 풍속에 대한 그리움도 묻어난다. 신랑의 가마를 동네 글방 학생들이 멈춰 세우고 시작하는 탈선놀이 문답이 등장한다.

"어디로 가는 길손인가 여쭈어라""송씨 집에 고운 꽃이 피어 있다 하여 그 꽃을 찾아 거두러 가는 길이라 일러라" 등의 문답에는 풍류가 있고, 한 집안의 대사를 동네 잔치로 생각하는 옛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도 느껴진다.

탈선놀이 뿐만이 아니다. 여름이면 스무살 안팎의 동네 청년들이 퇴비를 만들기 위해 두레를 만들어 산으로 풀베기를 다녔다는 풀품앗이, 풀품앗이에 지친 두레패가 벌이는 촌극놀이인 죄털기 곤장마당 같은 풍속도 소개된다.

죄털기 곤장마당이란 풀짐을 허술하게 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장난삼아 곤장을 때리는 놀이. 일부러 장으로 가는 길목에 판을 벌였는데 지나가는 장꾼들은 구경값을 던져주기도 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 글들을 쓰면서 내 어린 시절을 새롭게 다시 사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누렸다"는데, 그 행복이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도 어렵잖게 전달된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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