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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탈출' 꿈꾸며 살인·파괴 자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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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승희의 비디오테이프 내용은 세상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로 가득했다. 사진 속 조승희는 범행 당시와 똑같은 검은 셔츠와 ‘보이스카우트풍’ 조끼를 입고 있었다. 총을 겨눈 그의 모습은 사건 당시를 연상시켰다. [AP=연합뉴스]


소설

'이스마일 액스(Ismail Ax)'는 조승희의 다중살인 행각을 푸는 코드다. 범행 현장에서 자살한 그의 팔 안쪽에서는 붉은 잉크로 새긴 이스마일 액스라는 문구가 발견됐다. 미 NBC방송에 보낸 우편물 발신인란에도 'A. 이슈마엘(A. Ishmael)'이라고 적었다. 조승희에게 이스마일 액스는 무엇인가.

워싱턴과 서울의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미국 소설 '대평원(The Prairie)'에 나오는 등장인물(Ishmael Bush)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하녀 하갈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뜻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분석이다. 'Ishmael'과 'Ismail'의 차이는 이슬람 교도를 '모슬렘(Moslem)' 또는 '무슬림(Muslim)'으로 표기하는 것과 같으며 동일한 의미다.

조승희는 버지니아공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 때문에 소설 '대평원'의 이슈마엘일 가능성이 있다. '대평원'은 19세기 초 미국의 문호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가 썼다. 문명의 탈출을 시도하는 이슈마엘 부시가 총과 도끼를 갖고 대평원을 넘는 과정을 그렸다. 이 중 도끼는 살인의 도구로서 파괴의 의미와 함께 주거지를 만들 수 있는 창조의 뜻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영문학자 윌리엄 고츠먼은 이슈마엘을 "추방자이자 무법자인 떠돌이(outcast and outlawed wanderer)"로 분석했다. 영문학도인 범인 조승희가 이 소설을 본떠 자신의 상징을 '이스마일의 도끼'로 표현했을 거라는 추정이다.

코펜하겐대 영문학과 헤닝 골드백 교수는 논문에서 "이슈마엘은 잔인하고 무식하며 자연과 문명 사이의 경계를 상징한다"며 "그는 사회 변방에 살며 동시에 자연도 존중하지 않아 모든 나무를 베어버리는 등 법 위에 군림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한국외대 성경준(영미문학) 교수는 "이슈마엘은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백경(Moby Dick)'의 화자(話者) 이름"이라며 "'나는 세상이 싫어지고 문득 권총 자살을 하고 싶을 때 바다로 간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과 학자들은 조승희가 팔에 영미문학 작품 등에 등장하는 'Ishmael' 대신 아랍어식 표기법인 'Ismail'이라고 쓴 것을 두고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동조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제스처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박성우.한은화 기자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1789~1851년)=미국 개척시대를 소재로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미국 장편소설의 아버지라 불린다. 13세 때 예일대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퇴학을 당하고 선원.해군 생활을 거쳐 30세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대평원'을 비롯해 영화로 제작된 '모히칸의 최후'(영화 제목은 '라스트 모히칸') 등이 있다.

종교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하녀 하갈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그는 동생 이삭을 괴롭히다 쫓겨난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란 이름은 방랑자.추방자.망명자란 의미로도 쓰인다. 이런 배경에 범인 조승희가 공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무슬림(이슬람 교도)은 이스마엘을 조상으로 여긴다.

조승희는 선언문에서 '영혼' '예수님처럼 죽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기분' 등 종교와 관련한 언급을 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그가 이번 참사를 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신의 분열증적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위해 종교를 끌어온 것이라고 종교계와 종교 관련 학계는 보고 있다.

경희대 사회과학부 송재룡(종교사회학 전공) 교수는 "조승희의 말에는 '십자가의 메커니즘'이 담겨 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대신해 죽는다는 일종의 심리적 '승화'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립된 삶과 분열증 상태에서 빚어 놓은 망상적 메커니즘이다"고 말했다.

특히 세상과의 '주고받음'이 매우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송 교수는 "보통 사람들은 현실에서 느낀 것을 내 속에 담았다가 다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조승희는 안에 담기만 했을 뿐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나와 세상이 서로 응하는 조응 과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절연체'였다"고 했다.

'너희는 내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 '영혼을 파괴했고 의식을 불태웠다'는 조씨의 말에서 보듯 그는 엄청난 고통과 피해의식에 짓눌려 있었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예수님처럼 죽는다'는 대목 역시 자기 정당화를 위한 인용으로 종교계에선 보고 있다. 심수명(국제신학대학 상담학 주임교수) 목사는 "팔에 붉은 잉크로 써놓은 '이스마일 액스'(이스마일의 도끼)'라는 단어에서 보듯 그는 종교적 기이함과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종교를 자기 환상의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썼다"고 설명했다.

심 목사는 "이런 인격 장애가 대량 학살까지 이어진 것은 심리적 측면 외에도 이민 1.5세대라는 사회.문화적 연관성 등을 놓고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백성호 기자

게임

"조승희는 카운터스트라이크 등 폭력성 있는 게임을 즐겼다."

워싱턴 포스트는 조승희의 고교 시절 친구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보도했다. 19일 미국 NBC방송을 통해 공개된 범인 조승희의 사진 중에는 검은 색 티셔츠에 카키색 조끼를 걸친 모습이 있다. 어깨에는 탄창을 두르고 있다. 손가락이 나오는 반장갑을 끼고 양손에 한 자루씩 권총을 들고 있다. 이는 카운터스트라이크 게임에 나오는 전투원의 기본 복장과 매우 흡사하다. 칼을 들고 있는 사진도 게임 캐릭터가 칼을 쥐고 적을 노려보는 자세와 거의 일치한다. 이 때문에 조승희의 범행이 이 게임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인기를 끈 카운터스트라이크는 '1인칭 슈팅(FPS.First Person Shooting)' 게임의 대표작이다. FPS 게임은 모니터의 장면이 사람의 실제 시선과 비슷하다.

게임 참가자는 테러집단과 반(反)테러집단으로 나눠 싸운다. 기관총.권총.라이플.수류탄.칼 등을 선택해 적군을 죽인다. 캐릭터가 선택하는 M16.AK-47 등은 명칭과 외관도 모두 실제 무기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 중엔 조승희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인 글록도 나온다. 게임에선 총을 쏠 땐 탄알 수의 제한에 따라 탄창을 바꿔야 한다. 이 같은 설정도 범행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계원예대 한혜원(멀티미디어디자인) 교수는 "실제와 비슷한 갖가지 설정에 정교한 3차원 그래픽이 지원돼 게이머가 가상공간 속에 진짜로 들어가 있는 듯이 느낀다"고 말했다.

온상민 온게임넷 해설위원은 "이 때문에 북미와 유럽 젊은이들에겐 스타크래프트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FPS인 '서든 어택'은 동시 접속자가 최대 21만 명에 이를 정도다.

잔혹한 가상현실 세계를 현실과 혼동해 실제로 폭력을 저지른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지난해 11월 독일에서는 카운터스트라이크의 팬이던 18세 소년이 재학 중인 학교에 폭발물을 터뜨리고 총기를 난사한 뒤 자살, 3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 네티즌은 조승희의 범행에 대한 기사에 "32킬(kill.사살한 적군 수)에 1데스(death.게이머가 사살당한 횟수). 존경스럽다"는 댓글을 남겼다. "권총으로 헤드샷(headshot.한 발로 사살), 훈장을 줘야 한다"는 댓글도 있었다. FPS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쓰는 은어들이다.

숭실대 배영(정보사회학) 교수는 "현실세계에서 소외된 채 게임에만 몰두하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며 "조승희처럼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는 분별력이 사라지면 심각한 폭력사고를 저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천인성.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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