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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힘들다고 다 망가지는 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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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구의 13평 영구 임대아파트에서 지내는 김수해(가명.77) 할머니. 일본군 종군위안부(성 노예) 출신이다. 만 열네 살이던 1944년 "외국에서 돈 벌어오지 않겠느냐"는 동네 일본인의 꾐에 빠져 중국 헤이룽장성에 끌려갔다. 온갖 고초를 겪었고, 탈출하다 붙들려 벌건 인두로 고문도 당했다. 낙태수술 받다가 자궁마저 앗겼다. 징용당해 벌목 일을 하던 한국인을 해방 후 만났다. 가정을 꾸리고 양자를 들였다. 쭉 중국에 살다 남편이 세상을 뜬 뒤인 2003년 고향에 돌아왔다. 중국에 있는 아들이 행여 과거를 알까봐 가명을 쓴다. "일본 총리인가 뭔가 하는 놈이 우릴 강제 동원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서요"라며 치를 떨지만 한편으로는 "아들과 며느리가 내게 어찌 잘하는지, 내가 무슨 복을 이렇게 잘 타고났는지 알 수가 없소"라고 자랑하는 쾌활한 할머니다.

광주에 사는 고계연(75) 할머니. 삼천포에서 백화점 주인 막내딸로 태어났다. 진주공립여중(현 진주여중.고)까지는 양단 이불만 덮고 잘 정도로 남부러울 게 없었다. 해방과 6.25가 닥쳤고, 사회주의에 빠진 둘째 오빠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북한군이 후퇴한 뒤 아버지와 오빠를 찾아 지리산에 갔다가 자신도 빨치산이 되었다. 3년 만에 포로가 되었다. 동상으로 오른발 발가락이 모두 없어졌다. 징역을 살고 나오니 아버지와 오빠.동생 등 집안 남자 다섯은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원래 부르주아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보따리 장사로 아이보리 비누.초이스 커피를 팔다가 이불장사로 바꿔 크게 돈을 벌었다. 지금은 광주 이불가게를 딸에게 맡기고 틈만 나면 낚시 여행을 다닌다. 뉴욕 막내딸 집에 놀러갔다가 자메이카 베이에서 커다란 농어를 낚기도 했다. 고 할머니는 "내가 칠십 넘도록 살아남아 뉴욕에서 1m짜리 농어를 낚을 줄 상상이나 했겠소"라며 웃는다.

남달리 신산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 여덟 분의 일대기를 담은 신간 '여자전(傳)'(푸른역사)을 짬짬이 읽던 중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참사가 터졌다. 어제는 조승희가 NBC 방송에 보낸 충격적인 동영상과 사진들이 공개됐다.

그의 범행에 대해 주변환경.정신건강.컴퓨터게임에서 테러리즘의 영향, 미국의 총기 문화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도 두고두고 다양한 연구가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자전'에 나오는 할머니 한 분 한 분 모두가 조씨보다 몇백 배 가혹한 삶을 살았고 끝내 이겨냈다는 점이다.

한 청년의 황폐해진 정신세계를 단순히 인내심 부족 탓으로만 돌리거나 "요즘 젊은 애들은…"하며 혀나 차자는 뜻이 아니다. 성장기를 보낸 미국 사회에 책임을 넘기자는 말도 아니다. 나는 사람이 힘들다고 모두 망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어렵다고 다 남을 증오하고, 가난하다고 다 부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며,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찌 극한에 가까운 역정을 거친 여덟 할머니뿐일까.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 땅의 할아버지.할머니와 우리 부모 세대가 누구나 '소설 한 권 분량은 너끈히 되는'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 왔다. 그런데도 망가지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돈도 벌어들였다. 증오가 아니라 선망(羨望)과 성취동기가 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게 한국인의 진면목이다. 그분들의 유전자를 자식 세대가 이어받아 이만큼 살게 됐다. 국제사회에서 버젓한 나라의 국민으로 행세하게 됐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면 묵시록적인 엄청난 사건의 충격도 한결 가시지 않을까.

학살 사건에서 교훈은 교훈대로 찾아 고쳐 나가자. 그러나 극히 예외적인 사건에 우리 모두가 죄 지은 양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지금 나라 안팎에서 뛰고 있는 많은 젊은이도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는 위 세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들이 절대다수라는 걸 잊지 말자.

노재현 논설위원